
여름의 맛이란 뭘까.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고 난 뒤 마시는 시원한 음료수? 아니면 후텁지근한 저녁, 선풍기 바람 쐬며 먹는 수박 한 조각? 나에게 여름의 맛은, 12년 지기 친구와 함께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45km의 2호선을 걷고 난 뒤 맛본 메밀소바 한 그릇이다. 그건 단순한 음식을 넘어, 땀과 지침 끝에 찾아온 달콤한 선물이자, 친구와의 끈끈한 우정이 담긴 특별한 여름 면이었다.
작년 늦은 여름, 우리는 무모한 도전을 하나 계획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을 따라 45km를 두 발로 걷는 배낭여행.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만, 12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함께 겪어온 친구와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인 신분이던 나는 포항에서 휴가를 출발하자마자 부모님께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짐을 싸 무모한 여정을 준비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50분 지하철 첫차가 뜰 무렵, 눈을 떠 보니 우리는 가벼운 배낭을 메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익숙한 서울의 풍경은 낯설게 다가왔고, 발바닥은 천근만근, 어깨는 끊어질 듯 아파 왔다.
2호선 역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그냥 지하철 탈까?’ 하는 유혹이 고개를 들었지만,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친구가 있어 포기할 수 없었다. 서로에게 힘든 내색 없이 그저 발을 맞추는 팀원의 존재가 그때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 함께 땀 흘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45km의 여정을 끝냈을 때, 우리는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린’ 상태였다. 최종 목적지였던 강북구에 위치하던 친구의 자취방에 도착해서는 씻고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며칠 동안 쌓인 피로와 여행의 후유증이 한꺼번에 몰려와 마음까지도 어딘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쉽게 잠들 수도 없었다.
그때, 부엌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물 끓는 소리. 아, 맞다. 내 친구 녀석, 서울에서 2년 동안 호텔조리학과를 다니더니 요리 실력이 꽤 훌륭했다. 졸업하고도 가끔 뚝딱뚝딱 근사한 걸 만들어주곤 했으니까. 지친 나를 위해 뭘 하려나 싶었는데, 잠시 후 친구가 들고 온 건 바로 시원한 메밀소바 두 그릇이었다.
“야, 이거 먹으면서 쉬자.”
별다른 설명 없이 툭 던진 말이었지만, 그 순간 친구의 얼굴과 손에 들린 메밀소바의 비주얼을 잊을 수가 없다. 살얼음이 동동 뜬 시원한 쯔유, 그 옆에 곱게 갈린 무와 쪽파, 김 가루가 소복이 올라간 메밀면까지. 흔히 말하는 플레이팅도 예사롭지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식탁에 앉아 젓가락으로 메밀면을 집어 쯔유에 푹 담갔다. 그리고 후루룩 입 안으로 넣는 순간 아, 그 맛은 정말이지, 45km의 고생을 한 번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시원하고 짭조름한 쯔유와 탱글탱글한 메밀면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45km를 걸으며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그 시원함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갈아 넣은 무의 시원함과 쪽파의 알싸함, 김 가루의 고소함까지 더해져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다. 걷느라 뭉쳤던 근육들과 발바닥에 터진 물집들의 진통이 풀리는 것 같았고, 복잡했던 머릿속도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한 그릇의 메밀소바가 지친 내 몸과 마음에 시원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며 에너지를 채워주는 듯했다. 친구의 요리 실력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웠다.
친구는 말없이 내가 메밀소바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가 그릇을 거의 비워갈 때쯤 말했다. “진짜 돈 주고도 못 바꿀 낭만이다.” 45km를 함께 걸으며 서로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우리기에, 여행이 끝난 후에도 우린 잊지 못할 추억을 장식했다.
그날 먹었던 메밀소바는 단순한 면 요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2호선을 따라 45km라는 무모한 도전을 함께 완주한 우리 둘만의 기념비 같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회복의 음식이었으며, 우정의 증표였다. 돌아오지 않는 20대의 한순간에서 그 메밀소바 한 그릇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 후로 메밀소바를 먹을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간접적으로 떠오른다. 땡볕 아래 2호선 라인을 따라 걷던 힘든 순간들, 옆에서 함께해준 친구의 뒷모습, 그리고 모든 여정의 끝에서 친구의 손으로 만들어진 시원하고 따뜻했던 메밀소바 한 그릇. 비록 그날의 맛은 느낄 수 없지만, 메밀소바는 나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땀 흘린 노력의 가치, 함께하는 우정의 소중함, 그리고 지친 하루를 보낸 스물네 살의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글쓴이 : 임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