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콩국수 앞에서 종종 거짓말을 했다.
스물 셋, 지하철 요금과 밥값 사이에서 늘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던 취준생 시절. 턱없이 비싼 토익학원 수강료를 감당하기 위해 조교로 일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계절이었다. 오래된 에어컨이 웅웅 대는 여름, 반복되는 문제와 실수들. 나는 자꾸 틀렸고, 칠판을 지우고 프린트를 나눠주다 보면 끼니 시간이 되었다. 학원 지하의 분식집에서 잔치국수나 산채비빔밥을 사먹었다. 메뉴 중에서 손으로 직접 갈았다는 콩국수는 유독 비쌌다.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강사님들이 “수고했어”라고 말한 날에야 먹을 수 있는 메뉴였다. 맛은 없었다. 밍밍하고 꾸덕하고,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모르겠는 그 음식. 부드럽다 못해 느끼한 콩물 속에 남긴 면발을 슬쩍 숨겼다. ‘이게 도대체 왜 비싼 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진하고 든든하네요”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맛없는 걸 맛있다고 말하는 건, 고마움을 아는 어른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도 콩국수는 여전히 내가 아닌 사람의 입맛을 따라야 하는 음식이었다. 서울 3대 콩국수집이라는 곳이 회사 근처에 있었다. 여름이면 으레 팀원들과 점심시간에 그곳을 찾아 줄을 서서 먹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사님도 그 집 콩국수만큼은 연신 감탄하며 사리까지 추가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사님, 의사결정을 사리 추가처럼 시원하게 좀 해보세요.’
맛은 여전히 별로였다. 예전보단 나았지만, 여전히 손이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역시 맛집이네요”, “이 집은 김치도 참 잘하네요” 같은 말을 입 밖에 꺼냈다. 그 어정쩡한 콩국수의 맛은, 아마 김치로 덮어 먹었던 것 같다. 이젠 입맛도 어른스럽게 꾸며야 하는 시기니까. 나 혼자만 동떨어진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세월은 콩국처럼 녹진하게도 흘렀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생각도 안 해봤던 자영업을 시작했다. 어릴 땐 늘 일터에 있던 아빠는 이제 어느 식자재 회사의 납품 일을 했다. 콩국수용 콩물을 식당에 공급하는 회사라고 했고, 가끔 집에 남은 콩물을 들고 오셨다. 엄마는 별미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며 좋아하셨지만, 나는 “콩국수는 안 먹어”라며 대충 넘겼다.
하루 종일 혼자 청소하고 나온 늦은 여름 저녁, 에어컨을 너무 틀었다며 전기세 걱정을 하던 그날 밤, 엄마는 또 콩국수를 만들어 놨다. 지쳐버린 허기짐에 아무 기대 없이 한입 먹은 콩국수.
“어? 엄마 이거 진짜 맛있다. 식당에서 사 온 거야?”
“그냥 아빠 회사에서 납품하는 거야. 식당들 여름에 한 철 파는 거.”
콩국수의 고소함은 여운이 길게 남았다. 한 모금 삼킬 때마다 콩 특유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천천히 지나갔다. 적당히 차가운 국물은 답답했던 속을 시원하게 식혀주었고,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면발은 매출에 허기진 내 속을 조용히 달랬다. ‘괜찮아. 내일은 더 잘 할거야.’ 짜지도 달지도 않은 그 담백한 맛이 초보 소상공인의 지친 하루의 끝을 부드럽게 위로하며 덮어주는 것 같았다. 김치는 생각도 안 났다. 게다가 죄책감 없는 맛. 이 밤에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 식물성 단백질이 주는 묘한 안도감.
이래서 다들 콩국수, 콩국수 하는 거구나. 콩국수는 원래 맛있는 음식이었나. 아니면 이제 콩국수 맛을 아는 나이가 되어버렸나.
아. 그동안의 콩국수가 떠올랐다. 별생각 없이 먹던 콩국수가 내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질 줄이야. 처음 콩국수를 먹던 스물셋의 나, 그저 어른들 흉내 내며 ‘맛있다’고 말하던 나, 속으로는 꾸덕한 국물에 질려 하면서도 분위기에 맞춰 웃던 그 시절이 한입의 고소함과 함께 입안에 다시 떠올랐다.
이제 콩국수가 정말로 맛있어진 나는 어쩌면 조금은 어른이 된 걸까. 혹시 아주 오래된 거짓말에 익숙해진 건 아닐까.
분명한 건, 콩국수를 한 그릇 먹을 때마다 그 시절의 내가 조용히 떠오른다는 것이다. 고작 콩국수를 먹는 일이 자꾸만 그때의 나를 데려온다. 앞으로 몇 번의 여름, 몇 그릇의 콩국수를 더 먹으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하얗고 진한 나의 거짓말은,
그렇게 어느새 진심이 되었다.
글쓴이 : 이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