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나는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빛이 없는 깜깜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방암 3기였다. 병원에서 림프절 전이 소견을 듣는데, 머리끝이 쭈뼛 서고 숨이 턱 막혀 옴짝달싹 할 수조차 없었다. 암을 내 몸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곧바로 암 덩어리를 줄이기 위한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끔찍했던 항암 첫날,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다리에 쇠뭉치를 단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후로도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는 날이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졌다. 거기다가 한여름 더위까지 몰려오면서 몸은 완전히 녹초가 돼버렸다.
듣던 대로 항암은 먹는 일이 제일 고역이었다. 혀가 깔깔해 밥을 입에 넣으면 그야말로 모래알갱이를 씹는 것 같았다. 항암 초반엔 어떻게든 꾸역꾸역 음식을 넘겼지만, 항암 3회차에 이르자 그마저도 힘들어졌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토가 나와 물 한모금도 목 안으로 넘길 수가 없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응급실로 실려가 링거를 맞은 후 병원 침대에 절인 배추처럼 널브러져 있는 내게선 희망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앞으로 남은 항암 5회를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파삭하게 마른 몸, 힘없이 빠져 버린 머리카락, 초점이 흐려진 눈빛 …. 내 몸 어디에서도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음식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나를 안타깝게 여긴 친정엄마가 뭐라도 먹어야 한다며 메밀가루를 사가지고 집에 찾아왔다. 엄마는 어릴 때 내가 몸이 아플 때면 비빔막국수를 만들어 줬는데, 그때마다 잘 먹고 훌훌 털고 일어났던 기억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엄마, 손목 관절도 안 좋은데 면 반죽하느라 괜히 힘 들이지마! 어차피 내가 먹지도 못할 텐데 ….”
나의 말에도 엄마는 가루를 반죽해 면을 치댄 후 칼로 썰어 메밀면을 만들었다. 입맛은 없어도 엄마가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한결 부드럽게 풀리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메밀 면을 끓는 물에 삶아낸 엄마는 엄마표 수제양념장을 넣어 비빔막국수를 만들어주었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긴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자, 입 벌려. 네가 좋아하는 비빔막국수 들어간다!”
엄마는 막국수를 맛깔나게 비벼 내 입에 넣어주었다. 면을 삼키면 곧바로 구토가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막국수가 입에 들어오자 새콤달콤한 양념장이 입 안 가득 퍼지면서 투박한 메밀면이 부드럽게 목 뒤로 넘어갔다. 그간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텁텁함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35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맛있는 면요리는 처음 맛보는 것 같았다. 얼마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는 것인지. 설명하기 힘든 먹먹함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 역시 감정이 올라오는지 등을 돌린 채 훌쩍거렸다.
젓가락을 건네받은 나는 비빔막국수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나를 향한 엄마의 깊은 사랑과 안쓰러움이 비빔막국수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엄마표 비빔막국수를 먹고 있으니 절망뿐이던 가슴 속에서 조금씩 희망이 싹터 오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까짓 암쯤 보란 듯이 꼭 이겨내 보자고, 포기 하지 말고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고 의지를 다잡게 되었다.
“엄마, 엄마가 해준 비빔막국수 너무 맛있다! 배부르게 먹고 나니까 항암 부작용도, 암에 대한 공포도 모두 날아가 버린 것 같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요! 나, 꼭 힘내서 이겨낼게. 정말 고마워요.”
그 후로도 엄마는 관절 통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직접 면을 뽑아 비빔막국수를 만들어 주었다. 시중에서 파는 메밀면을 사다가 해달라고 해도 엄마는 늘 직접 면을 만들었다.
친정엄마가 해준 비빔막국수 덕분에 절망적이고 위태로웠던 시간들이 한걸음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항암 8회 차가 끝나고 드디어 나는 수술대 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벌써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암 완치 판정을 받고 지금까지 재발 없이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엄마가 만들어준 그날의 비빔막국수 덕분이었다. 여러 고비들을 넘길 때마다 엄마가 해준 비빔막국수는 항상 나를 지켜주는 보약이었고 희망비타민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이맘때쯤이면 내 마음에도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자란다. 매년 여름, 엄마가 해준 비빔막국수를 만들어 보지만 엄마의 맛은 결코 흉내 낼 수가 없다.
엄마표 비빔막국수를 다시 한 번 먹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서인가, 오늘따라 유독 “비빔막국수 맛있게 만들어 줄 테니 얼른 와!”라고 말하는 친정엄마의 정겨운 목소리가 그립다.
글쓴이 : 김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