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는 낳아주신 어머니 외에 또 한명의 어머니가 있다. 학창시절 내가 하숙을 했던 곳의 이모님이다.
과거 시골에서 살았던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계기로 인근 도시로 나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하숙집을 처음 찾아간 날, 푸근한 인상의 하숙집 아주머니는 바짝 긴장한 내게 다가와 자신을 이모처럼 생각하라며 반겨주었다.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집을 떠나 유학까지 왔는데 성적이 나쁘면 안 된다는 강박감, 아는 사람 한명 없는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춘기의 외로움, 하숙집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야하는 어색함이 내성적인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학교에서도, 하숙집에서도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푸근한 인상처럼 인심까지 넉넉했던 하숙집 이모님은 밤늦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특하다며 매일 저녁 간식까지 손수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으려는 다른 하숙생들과 달리, 향수병에 빠진 나는 입맛을 잃고 비실거리기 일쑤였다.
계절이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으로 향하면서 나는 더욱 더 입맛을 잃었다. 그날도 입맛이 없어 아침을 거를 생각으로 등교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이모님이었다.
“오늘 이모가 열무국수 만들었어. 얼른 준비하고 내려와서 밥 먹어. 날씨도 더운데 아침 든든히 먹고 가야 기운 내서 공부를 하지.”
열무국수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식욕이 밀려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국수였는데, 이모님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열무국수를 만들어놓았다고 했다.
식탁에 앉자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 중에서도 열무국수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젓가락으로 열무국수를 들어 입에 넣었더니 아삭거리는 열무김치와 시원한 국수 면발이 한데 어우러져 입 안 가득 시원함을 전해주었다. 이모님이 만들어 준 열무국수는 신기하게도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던 열무국수와 맛이 비슷했다.
이모님이 만들어준 열무국수 덕분에 하숙집에 온지 한 달여 만에 처음으로 식욕이 돋아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내게 이모님은 “언제든 열무국수가 먹고 싶을 땐 얘기해. 맛있게 만들어줄 테니까.”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침밥을 든든히 잘 먹어서인지, 그날따라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전과 달리 하숙집도 조금은 친숙하게 다가왔다.
알고 보니 향수병에 시달리는 나를 걱정한 이모님이 어머니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고, 시원한 열무국수라는 말을 듣고 일부러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낯선 타지생활에 힘들어하는 나를 다독여주고 싶었던 이모님의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열무국수는 평범하다면 지극히 평범한 음식이지만, 이모님이 만들어준 열무국수는 단순히 배만 채워준 것이 아니었다. 아삭하고 시원한 그 음식에는 답답하고 무겁던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마법 같은 힘이 담겨있었다.
그날 이후 이모님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다정하게 학교생활에 대해 물었고, 하숙생들 사이에서 겉도는 내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따로 자리도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붙임성 없던 나도 조금씩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이모님은 열무국수를 비롯해 어묵국수, 잔치국수, 콩국수 등 다양한 국수 요리들을 주기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하숙집 친구들이 열무국수 귀신이라고 놀릴 정도로 열무국수만 나오면 기분이 들떠 몇 그릇씩 해치우곤 했다.
순조롭던 일상에 태풍이 휘몰아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평소 지병을 앓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나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집을 떠나 먼 타지에서 유학생활까지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 얘기를 전해들은 아버지가 하숙집까지 찾아와 명문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 좋아했던 어머니를 떠올려 보라면서 내게 이곳에 머물 것을 당부했다. 여기에 이모님까지 나서서 “너희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네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좋은 대학에 갈 때까지 내가 엄마 역할을 대신 해주겠다고 약속했었어. 엄마를 위해서라도 이곳에 남아서 열심히 공부하면 어떻겠니? 이모가 엄마 대신 많이 도와줄게.”라며 간곡히 타일렀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나는 하숙집에 남기로 결정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고, 나를 보살펴주겠다는 이모님의 마음도 고마워서였다.
이후 이모님은 내가 어머니 생각에 우울해하거나, 입시 스트레스로 힘들어할 때마다 열무국수를 만들어 주었다. 열무국수를 먹으며 어머니 생각이 나 울컥 눈물을 쏟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모님이 만들어준 열무국수에는 어머니와 같은 따스한 애정이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모님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고등학교 3년을 무사히 마친 나는 결국 원하던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합격소식을 듣던 날, 이모님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이 소식을 하늘에 있는 네 엄마가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니.”라며 눈물을 흘렸다. 하숙집을 떠나던 날, 정들었던 이모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과 아쉬움에 나 역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대학에 진학해 서울로 올라간 후에도 나는 이모님께 종종 전화를 드리고 한 번씩 찾아뵈었다. 감사하게도 이모님은 내가 오는 날이면 항상 열무국수를 만들어 놓고 반겨주었다. 열무국수를 먹고 나면 신기하게도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면서 어떤 어려운 일들도 다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아났다. 입대를 앞둔 어느 날에도, 제대를 한 후에도, 첫 월급을 타 인사를 드리러 간 날에도 이모님이 내어주신 열무국수는 내 마음을 산뜻하게 채워주었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이모님을 뵈러간다. 허리가 좋지 않아 하숙집 운영을 그만둔 상황에서도 나를 위해 열무국수만큼은 빼놓지 않고 만들어주신다. 30년을 먹어온 열무국수인데도 질리지가 않고 맛있다. 집에 가서 만들어 먹으라며 내 손에 열무국수 재료를 넉넉히 담아 들려주실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매번 열무국수를 콩나물 무치듯 뚝딱 해주셨던 이모님. 아니 30년 동안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어머니가 더욱 건강하셔서 더 오랜 시간 열무국수를 맛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쓴이 : 정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