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가족은 네 사람.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나.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같은 대화를 나눈다.
한창 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8월 3일, 아들의 생일이 다가오면 나는 묻는다.
“생일엔 뭐가 먹고 싶어?” 대답은 언제나 같다. “평양냉면이요.”
단순하고 익숙한 말이지만, 그 한마디에 우리 가족의 여름 풍경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아들의 생일은 한여름의 한가운데다. 해는 유난히 길고, 공기는 눅눅하며, 바람조차 더운 기운을 머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마다 하나의 약속처럼, 평양냉면을 먹으러 간다.
도곡동 평양냉면집. 2018년 처음 그곳을 찾았던 날은 동네 식당이라는 이유만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때였다.
그땐 평양냉면이 슴슴하다는 것도 잘 몰랐다.
아이는 아직 작고, 얼굴엔 말간 미소가 가득했는데, 그때의 풍경은 지금도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가운 공기와 함께 잔잔한 분위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주문은 늘 같다. 평양냉면.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맑은 육수, 메밀 향이 은근하게 퍼지는 면발, 그리고 단정하게 올려진 고명들. 겉으로 보기엔 소박하지만, 속은 깊고 단단하다.
아들은 그릇 앞에서 조용히 면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육수를 한 모금 머금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스르르 피어나는 미소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음식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가족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아들에게도 특별하게 느껴졌던 걸까. 한때 나는 평양냉면은 어른들만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것은 아들의 ‘최애 음식’이 되었고, 그 사실이 지금도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여름의 냉면은 분명 차가워야 하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따뜻한 온기가 흐르고 있다. 슴슴한 육수는 과하지 않기에, 되려 담백하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삶의 맛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자극적이지 않지만, 천천히 곱씹을수록 그윽한 풍미가 마음에 배어드는 것처럼. 냉면을 앞에 둔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한 해의 더위를 함께 지나고 있다는 위안을 느낀다.
말없이 면과 육수를 빠르게 삼키는 남편, 고사리 같은 손으로 포크를 쥐고 냉면을 후루룩 먹는 딸, “역시 평양냉면이 최고야.” 하며 툭툭 끊어지는 자연스러운 메밀의 식감과 은은한 향을 천천히 음미하는 아들.
그 모습들이 하나하나 모여, 우리 가족만의 여름 풍경이 된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면, 다시 무더운 공기가 몸을 감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더위는 전처럼 무겁지 않다.
속이 시원해졌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따뜻한 감정이 가슴에 잔잔히 퍼진다.
그건 아마도, 가족이 함께한 조용한 기쁨.
작고 평범하지만 단단한 사랑일 것이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자라, 이 풍경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들의 마음 어딘가에, 여름과 냉면과 가족이 함께 어우러진 이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을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도 자신의 아이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엄마랑 아빠랑, 내 생일이면 꼭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었지.”
여름은 해마다 다시 찾아오고, 평양냉면은 여전히 슴슴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한 그릇의 냉면이 품고 있는 이야기만은, 해마다 조금씩 더 깊어질 것이다.
우리 가족의 여름은, 그렇게 평양냉면 위에 조용히 흐르고 있다.
글쓴이 : 선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