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부터, 나는 지독히도 입이 짧은 아이였다.
반에서 늘 제일 작고 말랐기에, 엄마는 부던히도 나를 먹이려고 늘 애를 쓰셨다. 그런 내가 남기지 않고 유일하게 먹어댔던 것이 바로 ‘면 요리’.
국수 종류는 거의 남기지 않아서 잔치국수와 냉면 등 면 음식을 집에서 자주 해 먹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렇게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국수와 면은 늘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향에서 벗어나며 열린 새로운 면의 세계
경기도 최북단, 서울보다는 북한과 인접하여, 늘 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뉴스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 나의 고향이다. 2025년 현재까지도 지하철이 개통되지 않아서, 발전이 많이 더딘 곳,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곳. 상권이 개발되지 않아 당연히도 다양한 트렌드의 음식이나 요리 등도 접하기 힘든 곳이었다.
대학교에 가며, 고향을 떠나 처음으로 봉골레 파스타를 접했을 때의 엄청난 행복감을 시작으로, 다양한 면 요리 탐방에 나서며 인생의 즐거움을 찾았다.
그러던 중 드디어 만나게 된 그 음식 ‘평양냉면’
친구가 늘 적극적으로 권유했지만, 어릴 때부터 자라온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왠지 모를 거북함이 들었다. 항상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면 전쟁과 뗄 수 없는 지역에 살았기에, 어린 시절 마음 한구석이 늘 불안하게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문에 냉면 앞에 붙인 ‘평양’ 두 글자에 거부감이 든 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스물여섯, 그 해 처음 만난 평양냉면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 틈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함께 서 있게 된, 스물여섯 살의 여름. 그 해는 극도의 폭염이 계속되던 해였다. 결국 친구의 계속되는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평양냉면으로 향하는 무리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더위에 녹아내려 아스팔트와 닿기 직전, 드디어 우리의 번호가 호명되었다. 친구와 자리에 앉아, 가격표를 보고 첫 번째 충격을 받았다. “냉면 한 그릇이 이렇게 비싸다니, 같은 북한지역의 함흥냉면은 서민의 주머니를 지켜주는 든든한 음식이었구나.” 속으로 조용히 곱씹어보며, 평양 물냉면 2개를 주문했다. “어디 얼마나 맛있는지 두고 보자” 하는 심보로.
의외로 음식은 금방 나왔다. 고요하고 투명한 육수 위로 얇은 면, 그 위에 올려진 계란과 고기 고명, 그리고 얇게 썰려진 대파와 고춧가루 약간. 배 고명도 오이 고명도 없는.
나에게는 확실히 반가운 비쥬얼은 아니었다. 서둘러 젓가락을 드는 친구의 입꼬리에 미소가 한가득 걸려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르게 얄미운 생각이 들어, 나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친절하지 않은 음식을 접하는 태도
나에게 익숙하지도, 첫인상이 친절하지도 않은 음식을 접하는 태도는 바로 국물이나 육수부터 맛보기.
면이 요리의 주인공이라면, 육수는 요리의 조연이다. 주인공을 빛나게 해주면서도 감질 맛나게 해주는 그런 역할. 조연이 훌륭하면 그 연극은 대부분 성공한다.
숟가락을 집어 들고는 그릇 바닥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 투명한 육수를 숟가락 가득 떠올렸다. 입으로 조심히 가져다 넣는 순간.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사랑의 평양냉면
새콤달콤한 맛도 없고, 슴슴하니, 밍숭맹숭한 바로 그 맛. 예상했던 맛과 전혀 달랐던 육수.
하지만 분명히 맛있었다. 처음엔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지만, 진하디 진한 육향과, 짭쪼름 하면서도 감칠맛이 서서히 올라오는 맛. 가공되지 않은 면의 거칠면서도 향긋한 메밀향이 육수에 살짝 섞여서 은은히 풍겨나왔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그릇을 들었다.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절반이나 먹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나는 평양냉면과 지금 사랑에 빠졌구나.”
의기양양하게 나와 평양냉면을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을 깨닫고는 조용히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차분하게 젓가락을 집어 들고는, 육수에 면을 조금 풀었다. 드디어 주인공을 만날 차례.
후루룩 한입 먹고 나자, 역시나 만족스러움으로 입안이 즐거웠다. 육수에 은은하게 느껴지던 메밀향이, 이번엔 진하게 입안 가득 퍼지며, 부드럽게 흩어져나갔다. 그 뒤로 잔잔하게 느껴지는 깔끔한 육향의 조화. 주연과 조연이 완벽한 너무 훌륭한 한 그릇의 연극이었다. 이미 여름날 폭염의 더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전쟁의 평양냉면
그 해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애증의 평양냉면을 먹기위한 전쟁이.
평양냉면에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계속 슴슴한 그 맛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며 여러 유명한 식당의 평양냉면들을 맛보고 나서, 가게마다 육수가 다 다르고 특징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동치미 육수를 섞어서 상큼한 맛을 내는 곳도 있고, 오로지 육향만을 내는 고기 육수를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평양냉면을 만드는 식당이 몇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마니아들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알려졌다 싶은 가게들은 모두 줄을 서야 맛볼 수 있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이 중요했다.
계획을 세워 열심히 식도락 여행을 떠났지만, 패배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 밀키트
바야흐로 밀키트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집에서도 고퀄리티의 음식을 직접 간편하게 해 먹을 수 있도록 한 봉지로 재료가 포장되어 나왔다.
나를 따라 덩달아 평양냉면 마니아가 된 남편은, 어느 날 마트에서 정말 잘 포장된, 다양한 종류의 밀키트를 코너를 보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몇 년이나 긴 줄을 서며 지치기도 했거니와, 사실 냉면의 맛만 좋다면 이제는 먹는 장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도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품들을 구매하며 입맛에 맞는 밀키트를 찾던 그 때, 드디어 ‘면사랑 평양식 고기 물냉면’을 주문하게 되었다. 냉동포장이 꼼꼼하게 되어있고, 면과 육수 고기고명까지 깔끔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육향만이 가득한 진한 육수와 면의조화. 바로 우리 부부가 찾던 맛이었다.
지금은 단종되어 추억이 된 제품이지만, 한동안 나에게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출시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괜찮다! 면사랑이라는 브랜드를 알게되었고, 다양한 면의 세계에 즐거움을 느끼는 중이니까.
글쓴이 : 김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