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과 면을 차갑게 식히는 동양의 감각,
전통을 존중하되 냉정하게 선을 긋는 서양의 태도,
그 사이에서 태어난 냉파스타 한 접시 이야기”

‘삶은 스파게티는 헹구지 않고 물기를 살짝 털어 소스에 넣습니다. 여기에 농도에 따라 면수를 살짝 붓고..’
‘스파게티는 물에 헹구지 않는 게 맞는 거죠?’
이탈리아 요리를 일로써 처음 시작한 10여 년 전만 해도, 파스타를 삶고 헹구는 줄로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것이 동양이든 서양의 것이든, 한국에서는 국물과 함께 익히는 누름 국수의 형태가 아닌 것은 일단 면을 삶고 냉찜질을 시켜버리는 것 (토렴이라는 또 하나의 역경도 있다!) 이 조건반사였을지 모른다. 가볍지만 진한 잔치국수부터, 비빔국수, 막국수, 타 문화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잘 받아들인 선례라 할 수 있는 짜장면까지, 그것들은 모두 불필요한 전분을 빼기 위해서 국수를 찬물에 헹구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국물이든 양념이든, 탁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파스타는 면에 남은 전분을 이용해서 조리를 마무리하는 과정이 있는 만큼 헹구지 않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이탈리아인들이 더러운 물(Aqua sporca)이라고 욕하는 아메리카노에 한술 더 떠서 얼음 동동 띄워 차가운 그것을 겨울에도 포기 못하고, 일본에 거주한 중국인이 만든 짬뽕을 한국에서 붉게 물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여름에는 얼음까지 넣어 차게 물들여버리는, 이빨이 시리도록 차가워야 여름의 외식 메뉴로 자리매김시키는 우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차가운 파스타는 어떨까? 답에 앞서서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13시간가량 떨어진 그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자, 당신은 지금 이탈리아의 여름 한가운데에 있다. 이왕이면 바다가 보이는 남부지역이면 더 좋겠다. 한낮의 온도는 38도에 육박하고 그늘 안에서 무서운 태양빛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휴대용 선풍기를 틀고 있고, 길거리에서 산 1유로짜리 물병은 야속하리만큼 빠르게 미지근해지며 레몬 그라니타를 먹기 위해 줄을 서있는 모습과 대조가 되는,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입에 털어 넣고 열심히 손짓을 하는 사람들, 그 사이를 시끄럽게 지나가는 스쿠터와 사이렌까지. 지중해의 태양을 온몸으로 끌어안게 된 그들에게, ‘차가운 국수’, 아니 파스타가 있을 것인가?
답을 주자면, ‘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그것은 프리모 피아토(탄수화물이 주가 되는 이탈리아의 코스 중 제 1요리)가 아닌 안티파스토(본 식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먹는 전채요리), 즉 샐러드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요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스파게티 프레띠(Spaghtetti Freddi, 차가운 스파게티), 또는 인살라타 디 파스타(Insalata di pasta, 파스타 샐러드)를 검색하면 차가운 파스타가 나온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이탈리아에 있던 시간이 적지 않았음에도 아직 레스토랑에서 이것을 파는 곳은 본 적이 없다. 가정에서 주로 해먹기 좋은 요리로 판단이 된다. 이 녀석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마트의 즉석식품 코너, 냉장칸에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자신을 집어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내가 찾아본 결과를 종합해 위에 질문에 답을 내려보겠다.
‘파스타를 헹구면 샐러드가 됩니다’.
차가워졌다는 이유만으로 본 식사가 아닌 전채요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아이러니를, 차가운 음식을 못 참는 우리네 입장에서 썩 석연치 않지만, 걱정 마시라. 맛은 훌륭하니,
파스타가 아니고 샐러드이기에 오히려 맛이 더 깔끔하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차게 해서 먹어도 된다는 용이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명예 이탈리아인’이라는 농담을 듣지만 수상할 정도로 한국인 바이브를 잘 아는 나, 내가 좋아하는 냉파스타는 무엇일까?
우선 소스를 준비한다. 잘 익은 토마토 두 개 (350g 정도)를 가볍게 데쳐 껍질을 벗기고 과육만 발라낸다. 좋은 방울토마토를 통째로 갈아서 써도 된다만 껍질이 많기에 한번 체에 내리거나, 착즙기를 이용하면 좋겠다. 그것을 소금, 마늘 반쪽 정도(이때만큼은 마늘 욕심을 내려놓으시라), 좋은 올리브오일을 넣고 분홍빛 소스를 만든다. 살짝 간간하게 하는 게 좋다. 비빔장을 떠올려보자.
그것을 차게 냉장 보관하여 준비한다. 미리 만들어두면 편리하다.파스타를 삶는다. 봉지에 적힌 것만큼(부드럽게 삶아야 찬물에 들어갈 때 부숴지지 않는다)삶아서 건지고 얼음물에 헹궈서 차게 만든 후 물기를 턴다. (롱 파스타를 쓸 거면 스파게티니나 카펠리니도 좋고 쇼트 파스타도 좋다)
소스와 물기를 턴 파스타를 버무리고, 여기에 작게 썬 모짜렐라 치즈, 질 좋은 올리브오일, 바질 잎이나 잘게 썬 파슬리를 곁들여서 완성하면 시원하면서 새콤하고, 깔끔한 맛의 차가운 파스타 한 접시가 완성된다.
여기에 감칠맛을 더 주고 싶다면 소스에 조개로 맛을 낸 육수(바지락이 좋다)를 좀 넣어줘도 좋다. (올리브오일을 조금 덜 넣어 농도를 고려하자) 색감과 식감을 위해서 썬드라이 토마토를 모짜렐라와 곁들여도 맛의 악센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여름 국수도, 이탈리아의 그것도, 차갑다. 다만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온도차만이 다를 뿐.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요리를 추구하고 공부하며 사랑하는 한국의 나도, 곧 청운의 꿈을 가지고 이탈리아에서 여름을 맞게 될 미래의 나, 레오나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동해, 그리고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지난한 더위를 등지고 가끔은 우리 모두 시원한 맛으로 하나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토마토처럼 붉은 태양의 정수를 소스로 만들어 냉장고에 던져버리는 호기도 부려가며 말이다.
글쓴이 : 박권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