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그러운 여름이 오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단골냉면집으로 달려간다. 살얼음이 낀 육수 안에서 찰랑거리는 냉면 가락은 어김없이 나를 꿈 많던 20대 젊은 날로 되돌려놓는다.
어린 시절 내 꿈은 가수였다.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에도 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당시 나는 화성학을 비롯해 피아노와 기타 등 각종 악기들을 배웠는데, 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 쉬는 날도 없이 이집 저집으로 품을 팔러 다녔다.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하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성공하고 싶어 열심히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내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 내가 속한 팀은 메인 싱어인 나를 비롯해 오르간 1명, 기타 2명, 드럼 1명으로 구성된 5인조 여성보컬밴드였다.
부푼 꿈을 안고 활동을 시작한 나에게 뜻밖의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전쟁이 중이던 베트남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파병 온 군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위문공연팀을 모집했던 것이다. 이번 기회에 해외로 나가 제대로 꿈을 한번 펼쳐보기로 뜻을 모은 우리 팀은 오디션을 봐서 당당히 베트남 위문공연팀에 뽑히게 되었다.
나와 우리 팀원들은 전쟁터에서 공연하다 사망해도 보상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베트남으로 향했다. 현재는 호치민으로 불리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도착하자, 공항에서부터 느껴지는 후텁지근한 온도와 습도 덕분에 비로소 베트남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첫 공연을 하던 날, 우리는 엄청난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 위에 올라 공연을 시작했다. 그간 연습해온 대로 밴드의 연주에 맞춰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 ‘If You Love Me’, ‘Love Me Tender’ 등을 연이어 불렀다. 첫 무대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함성과 박수소리 들으니 베트남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곳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쟁터였다. 어느 날인가는 늦은 저녁 시간에 숙소 밖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온 적도 있었다. 한참을 안에서 벌벌 떨다가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가보니 땅바닥에는 탄피가 잔뜩 나뒹굴고 있고, 대문도 떨어져나가 있었다. 꼼짝없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울면서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날이 밝아오자 공포에 질린 우리는 매니저를 붙잡고 제발 집으로 보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계약기간은 채우고 돌아가자는 매니저의 이성적인 설득에 우리는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매니저는 우리를 현지의 유일한 한국음식점인 ‘아리랑’으로 데려다 주었다. 베트남에 한국음식점이 있을 것이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기에 우리는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매번 공연이 끝난 후 미군 장교 클럽에서 식사를 해서 고향 음식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고온다습한 무더위에 시달려온 우리는 일제히 시원한 냉면을 주문했다. 곧이어 냉면을 한 입 집어넣자, 그 청량한 맛이 무더위와 향수병에 시달리던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치유해주었다.
이내 고국에 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냉면은 엄마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머나먼 타국 땅인 베트남에서도 냉면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나는 냉면을 먹으면서 울컥 북받쳐 오르는 엄마에 대한 뜨거운 그리움을 시원한 육수로 가라앉혔다.
그날 이후 전쟁의 공포가 밀려오거나, 고향이나 가족이 그리울 때면 한국음식점 ‘아리랑’으로 달려가 냉면을 먹었다. 감칠맛 가득한 냉면을 먹고 있으면 마치 엄마가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냉면을 먹는 순간만큼은 미군 장교 클럽에서 피자나 스테이크를 먹는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들뜨고 행복했다. 냉면 덕분에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고향에 대한 향수도, 전쟁터에 와 있다는 공포도 모두 참아낼 수 있었다. 결국 2년의 계약기간을 다 채운 나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풋풋했던 20대, 그 시절 베트남에서 먹었던 냉면만큼 내게 청량하고 시원함을 안겨준 음식이 또 있을까. 냉면은 나에게 영원히 20대 청춘을 상기시키는 젊음의 맛이다.
글쓴이 : 최옥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