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임(不姙). 마음 따뜻한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 나에게 생각지도 않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찾아간 난임 병원에서 임신이 어렵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우리 부부를 꼭 닮은 아이를 갖는 것이 소망이었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시험관 시술을 거듭하며 임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면서 우리 부부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갔다. 가슴 속이 전쟁 후의 폐허처럼 허허로웠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하루하루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봄날, 기적처럼 자연임신으로 아이가 찾아왔다. 머지않아 품에 안길 아이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고, 아이와 눈 맞춤할 그날을 상상하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충만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꿈만 같았던 시간도 잠시,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오면서 심각한 입덧도 함께 시작되었다. 남편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이것저것 사다주었지만, 몸이 음식을 거부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오고, TV에서 음식을 먹는 장면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어떤 음식이든 입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얼마 못 가 다시 게워내느라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엄마가 되는 것이 이토록 험난하고 힘겨운 일이라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입덧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날씨까지 무더워져 외출을 하지 못해 입맛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그 사이 몸무게가 5㎏ 가까이 줄었다. 내 입덧 때문에 뱃속 아이까지 덩달아 굶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함이 밀려왔다. 아이를 생각에서라도 내 안에서 밀어내지 않을 음식을 찾아야 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길에 “여보, 입덧을 할 때는 차가운 면 요리를 먹으면 입맛이 돌아온대. 이게 당신한테 영양 보충도 되고, 뱃속에 있는 우리 아이한테도 좋을 것 같아. 한번 먹어보자!”라며 음식통을 눈앞에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다름 아닌 초계국수였다. 쫄깃한 국수 면발에 식초와 겨자로 잘 숙성시킨 닭가슴살 고명을 보자, 갑자기 구역질 대신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날 위해 남편은 초계국수에 살얼음까지 동동 띄워주었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초계국수를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 입덧을 하느라 겪었던 고통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시원한 초계국수는 그간의 입덧을 한방에 잠재울 만큼 입맛을 돋우고 식욕을 자극했다. 나는 누가 옆에서 뺏어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초계국수 한 그릇을 허겁지겁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좀 전까지 입덧으로 구역질을 하던 속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오히려 통 먹지 못해 쓰라린 속에 초계 국수가 들어가니 언제 그랬냐는 듯 속이 편안해졌다. 새콤달콤한 국물도 국물이지만, 찰지고 쫄깃한 면의 환상적인 조합이 집 나간 입맛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평소 면요리를 특별히 좋아하진 않았었는데, 그 순간 면요리의 매력에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담백하고 상큼한 맛이 한여름 무더위까지 말끔히 사라지게 한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인 내가 맛있게 잘 먹은 만큼 뱃속 아이에게도 좋은 영양이 전달될 것 같아 뿌듯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속이 울렁거릴 때마다 초계국수집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다른 음식은 구역질이 나서 거부감이 드는데, 초계국수만큼은 속에서 잘 받아들여졌다. 입덧 때부터 시작된 나의 초계국수 사랑은 출산 전날까지 이어졌다. 초계국수로 영양보충을 제대로 해서 그런지, 나는 다섯 시간에 걸친 진통 끝에 무사히 첫째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첫 임신 때 입덧이 너무 심해 다시는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첫째 아이를 키우며 육아의 기쁨을 깨닫게 된 나는 한해 터울을 두고 시험관 시술로 둘째를 가지게 되었다.
혹시나 했는데 둘째 아이 때도 어김없이 입덧이 찾아왔다. 남편은 구역질 때문에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기다렸다는 듯 초계국수를 사왔고, 이번에도 나는 초계국수 덕분에 입덧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어느새 그 아이들이 훌쩍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다. 임신 때 초계국수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첫째와 둘째 모두 유독 초계국수를 좋아한다.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면 우리 네 식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초계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을 한다. 시원하고 상큼한 초계국수가 있어 올 여름도 청량하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 : 서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