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얘긴 잘못 꺼냈다가 몰매 맞는다.” 음식 전문지에서 10여 년 가까이 일했다는 한 전직 기자의 말이다. 전문가·일반인 할 것 없이 냉면을 놓고 벌이는 논란이 뜨겁기 때문이다. 이는 냉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각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배추와 무에 물을 많이 부은 김칫국에 잘사는 집은 고기를
삶아 붓고, 못사는 집은 동태를 삶아 육수를 낸 뒤 섞었지”
동치미 대신 고기 국물 … 희미해진 오리지널 ‘평양의 맛’
논란의 진원지는 서울이다. 그런데 서울냉면은 없다. 논란의 중심은 평양냉면이다. 시원한 육수에 쫄깃한 메밀 면을 말아먹는 그 냉면이다. 그런데 왜 평양냉면이 이렇게 서울에 와서 자리를 깔고 논란을 벌이는 것일까. 그 연유를 찾아가 봤다.
원래 평양냉면은 일제시대부터 서울의 호사가들이 찾던 외식 메뉴였다. 전통 음식연구가 김영복씨는 “1930년대 서울 낙원동 평양냉면집에서는 갈비 한 대에 20전, 냉면 한 그릇 20전을 받았다”고 전한다. 냉면이나 갈비 가격이 같았다는 말이다. 당시 최고의 호사스러운 외식은 갈비 2대와 냉면 한 그릇을 먹는 것이었다.
그러다 평양냉면이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해방 후였다. 6·25전쟁을 전후로 평안도 출신 사람들이 냉면집을 내면서다. 우래옥은 46년부터 서울에서 평양냉면을 내기 시작했다. 해방 전에 평양에서 음식점을 했다는 장원일(작고)씨가 평양 출신 냉면 주방장을 데려와 문을 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서면옥·남포면옥·의정부평양면옥 등도 이 무렵 문을 연다. 전쟁 후 서울에 실향민이 밀려들면서 평양냉면집은 이들의 향수 어린 아지트가 됐고, 서울 시민들에겐 더운 여름철 시원한 외식 장소가 됐다. 그리고 60년대 이후 이런 집들이 가족을 중심으로 분점을 내기 시작하면서 세포 분열하듯 퍼져 나간다. 의정부평양면옥의 두 딸이 문을 연 을지면옥·필동면옥 등이 그런 예다.
그러다 60년대 이후 서울에선 평양냉면의 정체성 논쟁이 시작된다. 논란의 중심엔 현재 벽제갈비에서 ‘냉면 어르신’으로 불리는 김태원(76)씨가 있다. 그는 50년대 평양 출신 중머리(냉면주방장)에게서 냉면 조리법을 배운 뒤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냉면집을 옮겨 다니며 평양냉면을 전수했다. 서울의 유명 냉면집은 모두 ‘김태원의 손을 거쳤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래서 그를 ‘냉면 전도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맛을 조금씩 바꾸는 과정에서 서울식 평양냉면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평도 나온다.
어쨌든 논란 속에서도 평양냉면에 대한 서울 시민들의 사랑은 지속됐다. 6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우래옥에서 일하고 있는 김지억(74)씨는 “4월 셋째 주 공일이 되면 창경궁 구경을 마치고 나온 나들이객들이 냉면을 먹기 위해 100m도 넘게 줄을 섰다”고 회고했다. “이런 날은 냉면 1000~2000그릇은 족히 팔았지.” 당시 냉면 한 그릇은 35원, 불고기 1인분은 60원. 95원이면 폼 나는 외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30대 초반 김지억씨의 월급이 4000원 정도였다고 하니 이는 꽤나 비싼 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냉면 한 그릇에 만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평양냉면은 어떤 것일까. 실향민 박윤성(78)씨의 회고담은 이랬다. “겨울에 무를 많이 넣은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는 게 평양냉면이지. 거기에 꿩 한 마리를 사다 그 고기 국물을 동치미에 섞는 거지.”
평안도가 고향이라는 김지억씨의 기억도 비슷하다. “배추와 무에 물을 많이 부은 김칫국에 잘사는 집은 고기를 삶아 붓고, 못사는 집은 동태 삶은 육수를 섞어 메밀국수를 눌러서 말아먹었지.”
결국 평양냉면 논란은 육수 논란이다. 진짜 평양냉면은 이렇게 동치미가 중심이 되고, 거기에 꿩이나 고기 국물을 섞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서울의 평양냉면은 조금 다르다.
김태원씨는 “물 240L에 소고기 갈비뼈와 돼지등뼈 10㎏, 사태살 30㎏, 양지살 30㎏, 노계 4마리, 파 3㎏, 무 2개, 마늘 2㎏, 생강 300g, 양파 10개를 넣는다”고 밝혔다. 이 육수 10L에 동치미 1L를 섞는다는 것이다.
반면 우래옥 김지억씨는 “물 100L(솥의 2/3)에 소고기 양지살과 사태살 42㎏(70근), 소금 2.3㎏, 간장 약 4L 이렇게 세 가지만 넣고 끓인다”며 “소고기 특유의 구수한 맛을 살리려면 다른 것을 첨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동치미를 섞지 않은 순 고깃국만을 낸다는 것이다. 서울의 평양냉면은 이렇게 동치미 국물 중심에서 고깃국이 중심이 된 육수로 조금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글 김영주 기자
사진 조용철 기자
(사진설명 : 벽제갈비의 김영환 회장(左)이 박영근(51) 조리사의 평양냉면 조리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조용철 기자] )
출처 : 중앙일보, 이 땅의 국수를 찾아서 ⑤ 평양냉면
링크 : http://news.joins.com/article/3643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