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면국지
면 요리를 좋아한다. 서정’면’이란 별명까지 얻은 적도 있다. 그러니 동네에서 면 요리 잘하는 집을 찾는 건, 집에서 가까운 마트나 병원을 알아두는 것만큼이나 필수적인 행위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철공소 골목이 집 주변을 감싸고 있다. 요즘 에야 철공소 사이사이 들어선 술집, 맛집, 카페들 덕에 ‘뜬 동네’가 됐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저 평범한 동네였다. 그 평범한 동네에 나름 자부할 만한 면 맛집이 있어 다행이다. 그중 세 곳에 대한 얘기를 풀어볼까 한다. 꼽고 보니 한국, 중국, 일본 면 요리가 하나 씩이다. 이름하여 ‘우리 동네 한중일 면국지’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접한 면 요리는 내 기억에 칼국수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자주 끓여 먹었다. 당연히 나도 자주 먹었다. 한국 사람 치고 칼국수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제면기가 없어도 집에서 밀가루 반죽을 해서 칼로 쓱쓱 썰고 육수에 넣어 푹 끓이면 그만이다. 육수라고 해봐야 있는 재료로 되는 대로 만들면 된다. 평양냉면처럼 육수 내기가 까다로울 이유도 없다. 그러니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 면 요리라 할 만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칼국수를 좋아하는 식성으로 푸근한 서민 이미지를
얻었다. 청와대 요리사도 칼국수를 만들어야 했다.
문래동 철공소 골목 안에 제법 오래된 칼국숫집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방송을 타면서 너무 유명해진 영일분식이다. 칼국수 면을 빨간 비빔장에 비벼 내는 칼비빔국수가 대표 메뉴다. 칼비빔국수야 말할 것도 없고, 국물 칼국수도 맛이 괜찮다. 그런데 이제는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엄두가 안 난다. 사실 국물 칼국수는 거기서 몇 십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숨은 노포가 더 맛있다. 간판도 제대로 없는 대추나무 칼국수다.
문래동 철공소 골목 대추나무 칼국수
문래동 철공소 골목 대추나무 칼국수
잔뜩 쌓인 잡동사니 틈으로 보이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놀랍게도 주방이다. 두개의 커다란 솥이 펄펄 끓고 있다. 하나는 갈색에 가까운 육수만, 다른 하나는 옆에서 육수를 덜어와 면을 넣고 끓이는 용도다. 주방을 지키는 할머니는 손님이 들어오면 곧바로 사람 수대로 칼국수를 끓이기 시작한다. 이곳 메뉴는 칼국수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 또 다른 사이드 메뉴가 있긴 하다. 공기밥이다.
주방을 지나, 신발을 벗고 들어가, 양반다리를 하고 상에 앉으면, 차가운 보리차가 손님을 맞는다. 어릴 적 집에선 생수가 아니라 보리차를 끓여 먹었다. 구수한 보리차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으면, 정말 어릴 적 할머니가 끓여 주신 것 같은 칼국수가 나온다. 누런 국물과 면 위로 달걀, 유부, 고추, 호박, 김 같은 고명과 건더기가 듬성듬성 올려져 있다. 국물을 한 숟갈 떠먹어 보면, 캬~ 소리가 절로 나온다. 놀랄 만큼 깊고 진한 맛이다. 황태, 멸치, 바지락 등을 넣고 오랜 시간 푹 고아낸 진국이다.
살짝 퍼질 정도로 익은 면에는 국물이 깊이 배어 있다. 면을 후루룩 다 먹고 나면 공기밥을 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집에 처음 갔을 때 한 그릇에 5천원이었다. 이후 6천원으로 올랐다가 지금은 7천원이다. 그래도 불만 없다. 만족도는 1만원 넘는 국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건 불편하다. 주인 할머니는 현대적인 모든 걸 거부하시는 듯하다. 대신 계좌이체는 가능하다. 점심 장사만 하며, 일요일은 쉰다. 할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하셨으면 좋겠다.
영등포 송죽장
중국 면 요리 중에선 역시 짬뽕이다. 어린 시절에는 짜장면파 였으나, 나이 들어 바뀌었다. 해장에는 제대로 된 짬뽕 국물만한 것이 없다. 어느 동네나 그렇듯 집 주변에 중국집이 많다. 배달에 주력하는 곳들이다. 시켜 먹으면 대체로 평범하다. 맛있는 짬뽕을 먹으려면 조금 멀리 나가야 한다. 그래봐야 영등포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옆에 가면, 타임스퀘어보다 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끌어 모아온 전통의 중식당이 있다. 7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송죽장이다.
이 집의 자랑은 고추짬뽕이다. 손수 뽑은 고추기름과 주문 즉시 제면기에서 뽑아내는 면으로 만든다. 송죽장만의 70년 노하우가 녹아 든, 매콤하면서도 부드러운 고추기름이 맛의 비결이다. 고추짬뽕 국물을 한술 뜨면 알싸하면서도 진득한 매운맛이 난다. 캡사이신을 활용한 자극적인 매운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급스러운 매운맛에 속이 확 풀린다. 맵다 맵다 하면서도 숟가락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사실 짬뽕은 정통 중식이 아니다. 일본 나가사키의 한 중식당에서 배고픈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값싸고 푸짐한 면 요리를 만든 것이 시초라는 얘기가 정설로 통한다. 돼지뼈 육수로 만들어 국물이 흰색인 이 요리는 지금 한국에서 나가사키 짬뽕으로 불린다. 이것이 1960년대 한국으로 넘어온 초기에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고추기름과 고춧가루를 넣어 매운맛을 내면서 오늘날처럼 인기를 얻게 됐다. 짬뽕 한 그릇 안에 한중일 음식 문화사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저것 뒤섞은 것을 ‘짬뽕’이라 부르는 것도 절묘하게 통한다.
문래동 로라멘
일본 면 요리 중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두말할 것 없이 라멘(라면)이다. 인스턴트 라면은 물론이고, 요즘은 정통 일본 라멘을 즐겨 먹는다. 라멘 또한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일본에서 더욱 발전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빈 철공소에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차리면서 형성된 ‘문래창작촌’ 안에 밥집, 찻집, 술집 등이 줄줄이 들어오자, 사람들이 줄 서는 맛집들도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로라멘이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일본 라멘 전문점이다.
처음엔 마제소바가 인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물 있는 라멘이 대표메뉴로 자리 잡았다. 이 집에 가면 교카이 돈고츠라멘을 먹어야 한다. 돼지뼈를 진하게 우려낸 뽀얀 국물의 돈고츠라멘은 후쿠오카에서 생겨났다. 한국에서도 홍대 앞 하카다분코 등 돈코츠라멘 맛집이 초창기 일본 라멘 전도사 구실을 톡톡히 했다. 돈고츠라멘에 해물을 뜻하는 ‘교카이’가 붙으면 해물 특유의 시원한 맛을 더한 돈고츠라멘이 된다. 교카이 돈고츠라멘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로라멘에서 교카이 돈고츠라멘을 주문하면, 뽀얀 국물의 돈고츠라멘 위에 갈색 가루가 얹어져 나온다. 처음엔 그냥 국물을 떠먹고 면도 후루룩 삼킨다. 어느 정도 먹고 나서 가루를 휘휘 섞으면 라멘은 새롭게 변신한다. 여러 해물을 갈아 만든 가루가 골고루 스며들면서 바다의 맛이 퍼져 나간다. 우리 음식으로 치면 돼지국밥과 어죽을 함께 먹는 맛 이랄까.
로라멘의 유일한 아쉬움은 웨이팅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바깥에서 기다려야 한다. 자리는 바테이블(다찌석)이 전부다. 그래서 오전 11시30분 오픈런이 최선이다. 이럴 땐 집에서 슬리퍼 신고 슬슬 걸어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로라멘과 대추나무 칼국수를 슬세권에 두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걸어서 30분 거리인 송죽장도 슬리퍼 신고 가볼까. 그럼 걸음이 느려질 테니, 거긴 스세권 (스니커즈 신고 갈 거리)으로 두련다.
서정민
한겨레 문화스포츠부장
첫 직장으로 한겨레에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자회사 씨네플레이 등을 거쳤다. 문화부에서 음악과 영화 분야를 오래 취재했다. 맛집 사랑이 유별나 맛있는 집이라면 발품 팔아 다닌다.
맛집 정보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올린다. @westmi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