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육성 셰프의
칼판, 불판, 면판
중화요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네모난 중식도, 그리고 불타오르는 웍이다. 도마위에서 춤추는 ‘칼의 연주’와 웅장한 화음이 되어 줄 ‘불의 화음’이 바로 중화요리다. 중화요리의 주방은 크게 3가지 판으로 구성되는데 먼저는 재료를 손질하며 요리의 시작을 알리는 칼판, 맛과 향을 입히며 요리를 마무리하는 불판, 그리고 각종 면과 딤섬, 만두를 담당하는 면판이다. 중식 주방은 칼판과 불판의 기싸움도 있었다. 옛날에는 칼판 출신 주방장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불판 출신 주방장이 대세가 된 것 같다. 면판은 수타면, 만두, 빵, 은사권, 딤섬 등 밀가루를 다루는데 요즘은 기계면을 사용하기도 하거니와 엄청나게 다양한 메뉴보다 코스요리를 내다 보니 그 힘이 많이 약해졌다.
칼판, 칼을 무서워하면 칼에 베인다
주방장이 정하는 특선요리가 많았던 시절 주방의 주도권은 칼판이 힘이 셌다. 주방 칼 중에서도 유독 무뚝뚝하고 무겁고 네모진 중식도(中食刀)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이 핵심이다. 주방에서 칼은 권력이다. 칼판에 서는 건 사부들만 할 수 있다. 조수들은 사부들이 쓰다가 무뎌지기 직전의 칼만 쓸 수 있었다. 사부들의 칼에 손을 대는 게 허락되는 유일한 시간. 바로 칼을 갈 때다. 주방 보조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다 이유가 있다. 칼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칼질을 하면 어찌되겠는가? 그건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중식도는 그만큼 무겁기 때문에 손에 익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중식도의 무게를 활용해서 칼질을 하면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고 힘이 안 들어간다. 하루 종일 칼질을 해야 하는 중식 주방에서는 중식도가 손목을 지켜주는 보물인 셈이다. 그 무거운 칼로 채도 썰고 회도 뜬다.
콰이(塊)는 재료를 큰 덩어리로 써는 기술, 피엔(片)은 종잇장처럼 얇게 써는 기술, 쓰(絲)는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채 써는 기술, 루이딩(如意刀)은 정육면체를 여러 개 붙인 모양으로 자르는 기술, 쒀이황과(蓑衣黄瓜)는 오이를 썰 때 한쪽은 직각으로 한쪽은 비스듬히 썰어 용수철처럼 늘어나게 만드는 기술이다. 마티다오(馬蹄刀)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재료를 다지는 기술이다.
‘중화요리’하면 불타오르는 웍을 생각하며 ‘불맛’이라고들 하지만 중화요리는 뭐니뭐니해도 ‘칼맛’이다.

불판, 중식에 영혼을 불어넣다
불판은 중식의 맛과 간을 담당한다. 중식에서 불맛이라 하면 웍(Wok)과 강한 불의 조화에서 비롯된다. 불판에서는 조리고 튀기고 찌는 모든 과정을 웍으로 한다.
작(炸)은 재료를 기름에 튀기는 조리법, 탕(汤)은 물을 넣고 재료를 끓이는 조리법, 활유(滑油)는 낮은 온도의 기름에서 재료를 데치는 조리법, 폭(爆)은 센 불에서 순간적으로 재료를 볶아내는 조리법이다.
불판장은 이런 조리법들을 통해 강한 화력과 섬세한 불 조절로 최상의 맛과 향을 이끌어낸다. 불판은 요리의 최종 맛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계로,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빠르게 볶아야 수분이 빠지지 않으며 센 불에서 짧은 시간 내에 향을 입혀야 식감이 살아난다. 웍을 돌리고, 국자를 돌리고, 불을 다루는 손은 무용수처럼 유려해야 한다. 불판은 타이밍, 리듬, 감각의 예술이다.
불은 일정하지 않다. 가스 압력도, 날씨도, 조리 순서도 늘 변한다. 그럼에도 같은 불맛을 유지하려면 오직 한 사람만이 불을 다뤄야 한다. 그래서 신중하고 장인정신이 있는 중식당은 불판장의 키와 동작에 맞추어 화구의 높이를 조정해준다. 웍을 들고 흔드는 손의 각도와 소스를 넣는 타이밍, 불을 끄는 각도까지 모두 손에 익은 높이에서 나와야 오차가 없다.
불판은 힘과 집중, 감각과 경험의 예술이다. 그 곳은 그저 요리를 하는 곳이 아니라 중화요리의 맛과 향, 품격을 최종 결정짓는 무대다.
면판, 손끝에서 밀가루가 살아난다
중화요리에서 ‘면판’은 다소 조용한 자리처럼 보인다. 불꽃도 없고, 강한 칼 소리도 없다. 하지만 이곳은 매일 가루가 반죽이 되고, 반죽이 생명이 되는 곳이다. 중국 요리의 뿌리를 이루는 수타면, 만두, 딤섬, 꽃빵은 모두 이 ‘면판’에서 탄생한다. 물과 만나 반죽이 되고, 숙성되며 살아 숨 쉬는 성질을 갖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질어지고, 너무 다루면 딱딱해 진다. 그래서 면판장은 밀가루의 상태, 날씨, 습도, 온도까지 몸으로 읽어내야 한다.
면판의 대표 기술은 단연 수타면(手拉麵)이다. 수타면은 단순히 ‘손으로 뽑은 면’이 아니다. 탄성과 리듬, 균형과 호흡의 예술이다. 또한 중국 요리의 예술이라 불리는 딤섬(點心) 역시 이곳에서 빚어진다.
요즘은 많은 식당이 기계면을 쓴다. 정확하고 빠르고 손쉽다. 하지만 기계는 그날의 기온, 가루의 촉감, 물의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지 못한다. 면판장은 반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낀다’. 손으로 누르면 반죽이 숨을 쉬는 걸 알고, 끌어당기면 면발이 몇 mm로 나올지 눈을 감고도 계산한다. 이 감각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수천 번의 반죽, 수만 번의 면 뽑기, 그리고 실수와 기다림 속에서 완성된다.
코스 요리가 중심이 된 요즘, 딤섬이나 면요리 없이 요리가 끝나는 식당도 있다. 그래서 면판은 불판, 칼판에 비해 조금 조용한 자리로 밀려나 있다. 하지만 진짜 정통 중식당이라면 면을 직접 뽑고, 만두를 손으로 빚고, 식사의 끝을 밀가루 음식으로 마무리한다. 그 한 그릇, 한 조각 안에 면판장의 손끝과 정성, 그리고 중식의 근본이 녹아 있는 것이다.
불판이 요리에 영혼을 불어넣는다면 면판은 요리에 온기를 더하고, 기억을 만든다.
정리 : 박현진 (누들플래닛 편집인)

글 왕육성 셰프
중식당 진진의 설계자, 진진 오너 셰프
50년 업력을 가진 백전노장. 부모가 중국 대륙 출신인 화교 2세. 중식계의 대부.
대관원, 홍보석, 사보이호텔 호화대반점, 플라자호텔 도원 등을 거쳤다. 코리아나호텔 대상해 주방장 역임, 현재 진진 오너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