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국수, 특히 포(Phở)로 흔히 알려진 베트남식 쌀국수는 약 10여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많이 찾는 외식 메뉴가 되었다. 감칠맛 가득한 고깃국물에 독특한 향신료의 향, 얇게 썬 고기가 고명으로 올라가고 생(生) 숙주를 뜨거운 국물에 넣어 살짝 숨 죽인 따뜻한 국수는 새로운 해장 아이템이 되었고 뻔하지 않은 점심 메뉴로 사랑 받았다.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 되었을 때 낯 선 메뉴라 주저하던 분들도 이제는 익숙하게 먹는 메뉴가 된 것이다. 30여년 전에 유학생활을 했던 미국에서는 동남아 현지출신 이민자들 뿐 아니라 한인유학생들과 교포들 에게 속을 풀어주는 해장메뉴로 꽤 인기가 있었다. 당시 미국의 퍼는 고기가 잔뜩 올라간 그야말로 곰탕 국수에 가까운 국수였는데 스리라차와 호이신 소스를 반반 섞어 고명으로 올려 준 고기를 찍어 먹고 진한 국물을 하늘하늘한 국수와 함께 마시고 나면 다시 에너지가 충전되던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다.
밀로 만들면 면 面, 쌀로 만들면 펀 粉
쌀국수도 역시 국수의 한 종류이다. 국수를 먹은 최초의 기록은 중국 진나라 때라고 알려져 있는데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이후 중국 북부의 면 문화가 남쪽으로 점차 퍼져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국의 북쪽 지방에서는 밀을 수확한 뒤 밀가루 반죽을 이용하여 면류를 만들었고 이 국수 문화가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남쪽에서 흔한 쌀가루로 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쌀국수 문화는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 이를테면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으로 퍼지게 되었다. 현재 중국의 쌀국수는 가느다란 국수의 형태 뿐 아니라 넓적한 형태로 만들어 요리하는 경우도 있다. 국수와 같은 형태를 미펀(米粉)이라 하고, 마치 붕대 같은 모양의 넓적한 국수는 헤펀(河紛)이라고 한다. 헤펀은 요즘 마라탕이나 떡볶이에 종종 들어가는 넓적한 중국 당면과 비슷한 너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딤섬 메뉴에 종종 보이는 쌀 반죽에 소를 넣어 감싼 창펀(肠粉)도 있다.
굵기가 다른 쌀국수의 면
쌀국수 면을 만드는 법
쌀국수를 만드는 방법은 중국이나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가 대부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쌀은 장립종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은 전분의 특성이 국수 제조에 더 적합하며 더운 남쪽 지방에서 널리 재배되는 품종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먼저 쌀을 물에 담궈 충분히 불린다. 불린 쌀을 적절한 양의 물과 함께 아주 곱게 갈아 묽고 질척한 쌀 반죽 상태로 만든다. 이 묽은 쌀 반죽을 헝겊이나 평평한 틀에 담아 증기를 올려 진다. 이 때 식감을 강화하기 위해 타피오카나 옥수수 전분을 살짝 섞어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식감을 위해 쌀 100%로 만들기도 한다. 반죽을 찔 때는 뚜껑을 덮어 가열하고, 찌고 나면 쌀 반죽의 전분이 익고 반 투명해 지며 어느정도 고체화 된다. 이렇게 굳은 반죽은 찜기에서 꺼내 평평한 곳에 올려 식힌다. 이 후 원하는 두께로 칼국수 썰 듯 썰어내면 국수가 완성된다.
더 가는 국수는 국수용 체나 국수틀을 이용해서 반죽을 밀어내어 만들기도 하지만 주된 방식은 평평한 반죽을 썰어서 만드는 방식이다. 쌀국수의 두께, 넓이, 부재료를 혼합하는 방식은 지방이나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국수를 만드는 과정은 쌀을 불리고, 불린 쌀을 갈아서 페이스트 같은 반죽을 만들고 넓게 펴서 찐 뒤 식혀서 자르는 과정이다. 이렇게 만든 면은 저장을 위해 말리기도 하고 즉석에서 바로 요리하기도 한다. 약 10여년 전쯤 우리나라에도 쌀국수 만드는 기기를 도입하여 매일 쌀 면을 만들던 레스토랑도 있었다.
쌀국수 면을 자르기 전에 쌀반죽을 익힌 다음 건조를 위해 펴 놓은 모습
베트남 쌀국수 건조장의 모습
베트남의 포, 반 포, 그리고 분
베트남의 대표적인 쌀국수 ‘포’
육수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포 가(phở gà) : 닭고기 육수
퍼 똠(phở tôm) : 새우 육수
퍼 보(phở bò) : 쇠고기 육수
퍼 해오(phở heo) : 돼지고기 육수
분짜는 북부(하노이식)가 원조로 국수와 채소, 고기를 소스에 찍어 먹는 방식.
이에 비해 남부(호치민식)는 소스를 부어 비벼 먹는다.
베트남식 쌀국수는 크게 국물 있는 포에 주로 사용되는 반 포와 구운 고기와 양념에 찍어 먹는 분으로 나뉜다. 반 포는 어느정도 두께가 있는 쌀 면이고 분은 아주 가느다란 소면 같은 국수다. 아주 가느다란 국수니까 분은 반죽을 썰어 만드는 국수가 아니라 국수 틀로 반죽을 짜 내려서 만드는 것. 포는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 시절에 베트남 북부(하노이 지역)에서 프랑스 요리의 영향을 받아 생긴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포’라는 이름도 프랑스 식 쇠고기 요리인 포-토-푀에서 왔다고 한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이 있기 전까지는 베트남에서 쇠고기를 이용해 진한 국물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수프를 끓이는 요리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식 프랑스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동남아시아 적인 요소가 강한데다 거리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아 프랑스 음식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 식 국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차대전이 끝나고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뉘는 과정에서 남쪽으로 인구가 이동하게 되고 자연스레 포는 베트남 남쪽으로 퍼지게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 포는 더 진한 국물에 숙주나 신선한 허브 등 고명이 더해지고 양념도 강한 국수요리가 된다. 베트남 전쟁기간과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을 탈출한 베트남 사람들이 이 포를 세계 각지에 퍼뜨리게 되었다. 이러면서 포는 쇠고기 국물 뿐 아니라 다양한 국물에 심지어 해산물까지 들어가는 현지화를 빠르게 형성하게 된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기 전에도 국물에 만 쌀국수는 있었지만 포 만큼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문화는 아니었다. 분짜와 같이 고기를 곁들여 양념에 찍어 먹거나 다른 재료와 함께 볶아먹는 넓적한 면요리가 오히려 베트남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국의 팟타이
태국의 팟타이를 웍에서 휘리릭 볶는 모습의 사진
면을 기름에 입혀 먼저 볶고 고기류나 해산물, 달걀, 숙주, 허브 등을 넣어 볶아 낸다
베트남의 쌀국수 중에서 쇠고기 국물에 말아 먹는 ‘포 보’가 대표격이라면 태국식 쌀국수는 태국의 국민 메뉴 팟타이가 대표주자 이다. 닭고기, 새우, 달걀과 함께 너무나 태국 스러운 새콤 달콤 매콤한 양념에 휘리릭 웍에서 볶아낸 쌀국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팟타이의 역사는 전통음식 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짧다. 태국 음식을 붐업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과정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으면서 태국스러운 느낌이 충만한 요리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창작물이라고 한다.
태국에도 퍼와 같은 쌀국수 국물 요리가 있다. 사실 쌀국수라는 게 물에 불린 쌀국수에 고명과 국물을 끼 얹으면 되니까 당연히 있을 만 하다. 태국식 쌀국수는 사용하는 면의 종류가 베트남보다 다양하다. 넓적한 면부터 아주 가는 면까지 사용하는 데 반해 베트남에서는 중간 굵기의 넓적한 면을 주로 사용한다.
베트남 식 쌀국수의 국물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진하면서도 깔끔하고 맑은 편이라면 태국식 쌀국수의 국물은 더 진하고 다양한 육수재료를 사용하고 향신료도 강하게 사용하는 편이다. 쇠고기 국물만 고집하지 않고 닭 육수, 돼지 육수를 마늘, 고추, 각종 향신료와 함께 푹 끓인 국물을 사용한다. 국수위에 올리는 고명도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에 미트볼이나 피쉬볼, 새우, 게 등등 다양하게 올린다. 태국음식 답게 레몬그라스, 라임잎, 고수 등을 이용하고 타마린드소스와 피쉬소스, 핫소스를 곁들이기도 한다. 당연히 베트남식에 비해서 달고 시큼하고 매콤하며 허브향이 풍부하고 맛이 진하다.
베트남 식 쌀국수가 북부 베트남에서 잘 발달된 뒤 각지로 퍼지면서 약간씩 지방색을 띄게 되었다면 태국식 쌀국수는 애초에 각 지방의 맛이 반영된 형태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태국의 국물 있는 쌀국수는 베트남 퍼와 같은 아이코닉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시아의 쌀국수 문화는 국수라고 하는 아주 오래된 음식 문화가 쌀이 풍부한 지역의 식재료와 만나 생겨난 음식문화이다. 그러다 보니 각 지방의 양념과 부재료를 받아들여 다양하게 발달해왔다. 그러나 국수 자체를 만드는 방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국수의 굵기, 약간의 부재료를 첨가하는 여부 정도만 다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두 나라인 베트남과 타이의 쌀국수는 만드는 과정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베트남 음식점에서 인기 있는 월남쌈을 만드는 라이스 페이퍼도 쌀국수를 만드는 방식과 유사한 반죽을 찐 뒤 자르고 말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국수를 만드는 방식은 비슷해도 이 국수에 맛을 넣는 방식은 각 나라마다 다르다. 부드럽고 양념과 국물을 쉽게 받아들이는 쌀국수의 넉넉한 포용력은 각 지방의 독특한 향신료나 지역 특산물로 만든 고명도 쉽게 받아들여 준다.
쌀국수를 즐기는 독자 여러분들은 어떤 양념과 국물, 어떤 고명을 올린 국수를 좋아하는지 궁금해 진다.
김욱성
셰프
중앙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이수하고 미국 UNLV에서 호텔경영학을, 존슨앤웨일스에서 컬리너리 아트와 호스피털리티 매니지먼트를 전공한 김욱성 셰프는 외식 경영의 이론과 실무, 조리에서 산업트랜드와 식재료의 발굴과 유통 분야까지 해박한 외식기획 및 실무 전문가다.
미식과 조리, 이로부터 이어지는 문화활동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실험적 테스트 키친 이트리 푸드랩을 운영하며 조리와 강의, 저술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