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지역별 쌀국수 이야기
식감도, 고명도 다양한 베트남 쌀국수 ; 소고기 쌀국수만 먹고 오면 아쉽다
푹 끓인 소고기 국물에 말아 내 씹을 새도 없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부드러운 면발.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오래된 베트남 쌀국수집에 들어서면 한국 노포 설렁탕이나 곰탕집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오랜 시간 끓여낸 국물의 증기를 타고 벽에 스며든 진한 육향, 어느새 반들반들해진 나무 테이블들. 퍼 보(pho bo)라 불리는 소고기 쌀국수가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베트남에서 소고기 쌀국수만 먹고 온다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베트남 음식은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베트남 음식은 퍼 보와 공심채(모닝글로리) 볶음, 계란 등을 넣은 볶음밥 등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초 한국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한국식 베트남 음식점의 메뉴와 닮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세계 5위의 쌀 생산국인 동시에 세계 3위의 쌀 수출국. 넘쳐나는 쌀로 만든 국수는 면의 굵기와 썰어낸 방식에 따라 다양하다. 우리가 국수를 소면·중면·칼국수로 나누듯이 말이다.
베트남을 대표하는 퍼 보 (소고기 쌀국수) ⓒ이미지 기자 (재사용 금지)
프랑스 식민 지배로 시작된 ‘퍼 보’
베트남 쌀국수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퍼 보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00여년 전 발달했다는 게 통설이다. 베트남 비프 스튜인 포토푀를 국물 요리로 만들었다는 설과 하노이 인근 남딘 지역의 전통 음식이 프랑스 식민 시대를 거치며 널리 퍼졌다는 설, 중국의 국수가 영향을 미쳤다는 설 등이 있지만, 이 모든 가정 역시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대중화됐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장 보편적 형태의 면인 퍼는 묽은 쌀가루 반죽을 얇게 펼쳐 말리거나 익힌 뒤 이를 돌돌 말아 썰어낸 것으로 얇고 넓적한 사각 형태의 단면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네 칼국수나 국시를 쌀가루로 아주 얇게 펴 만든 형태와 비슷하달까.
퍼 보는 들통을 매고 다니는 노점 상인들이 주로 판매하던 메뉴였다. 이를 메뉴로 처음 내놓은 상점은 하노이의 꺼우 고 거리의 베트남 식당과 버 호 정류장 앞의 중국 식당이었지만 베트남 전쟁 이후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남쪽으로 피난을 간 북쪽 사람들에 의해 지역별 특징을 더하게 된 것이다. 북부 지역의 퍼 보는 파나 양파, 고수와 절인 마늘을 곁들여 먹는 것과 달리 남부 지역의 퍼 보는 숙주와 향채, 칠리소스 등을 더해 먹는 식으로 변화했다. 국물 역시 북부는 맑고, 남부 지역은 좀 더 달다.
퍼를 소고기, 야채와 함께 볶아낸 퍼 싸오 보(Pho xao bo)
ⓒ VNGOLI
퍼를 뜰채 같은 곳에 펼쳐 튀겨낸 뒤 소스를 올린 퍼 싸오 존(Pho xao gion)
ⓒ HNAEdu
퍼는 국물의 주 재료에 따라 퍼 보(소고기), 퍼 가(닭고기)가 되기도 한다. 국물에 말아 먹는 것 외에 볶음이나 튀김으로 변형도 한다. 퍼를 소고기, 야채와 함께 볶아낸 퍼 싸오 보(Pho xao bo)나 데친 퍼를 뜰채 같은 곳에 펼쳐 튀겨낸 뒤 소스를 올린 퍼 싸오 존(Pho xao gion)도 별미이다. 겉은 고소한 맛이 강해지도록 누룽지처럼 바삭하게 하면서 속은 부들부들 쫀득한 퍼의 식감을 살리는 게 핵심. 이 위에 간장에 볶은 소고기·야채에 전분 물을 푼 소스를 올린다. 누룽지 대신 튀긴 쌀국수를 깔고 누룽지탕을 부어 먹는 맛이라고 하면 상상이 될까? 잘게 썬 빨간 고추를 담근 베트남 간장을 곁들여 먹거나 우리나라 갓 장아찌와 비슷한 베트남식 김치를 함께 볶으면 더 맛있다.
분을 이용한 쌀국수의 대표격인 분 보 후에(Bun bo hue)
ⓒ이미지 기자 (재사용 금지)
크기가 작은 총알 오징어와 새우를 섞어 만든 어묵을 올린
오징어 쌀국수 분 꾸어이(Bun quay)
중면·소면처럼 굵기에 따라 다른 쌀국수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베트남 쌀국수’라는 단어를 ‘퍼 보’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베트남 쌀국수는 다양한 면의 형태와 국물, 고명으로 그 종류를 넓힌다. 그 중 에서도 둥글둥글한 단면의 쌀국수 분(Bun)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익숙할 만한 식감이다. 우리가 기계식 냉면을 뽑을 때처럼 물에 갠 쌀가루를 체에 내려 면을 뽑는다. 분을 내리는 체의 크기에 따라 우리네 중면 같은 굵기가 되기도 하고, 우리의 가락국수 수준의 굵기가 되기도 한다. 부드럽게 훌훌 넘어가는 퍼와 달리 식감은 가락국수에 가깝다.
분을 이용한 쌀국수의 대표격은 분 보 후에(Bun bo hue)이다. 소고기(bo)를 주 재료로 이용한 국물에 가락국수 굵기의 분을 사용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쌀국수는 베트남 중부 후에(Hue) 지역에서 시작된 쌀국수이다. 레몬그라스의 향이 강한 국물에 소고기와 향채 등을 올려 먹는다. 굵은 고춧가루로 만든 소스를 더해 매콤하게 먹으면 그 맛이 배가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트랑이라 부르는 베트남 중부 냐짱에서는 생선과 토마토, 어묵을 넣은 분 까(Bun ca)를 먹는다.
분 보 후에나 분 까가 가락국수 같은 굵기의 면을 쓴다면 비빔 쌀국수 분 팃 느엉(Bun thit nuong)이나 분짜(Bun cha)는 훨씬 더 가느다란 분을 쓴다. 둘 다 구운 돼지고기나 완자, 베트남식 스프링 롤인 짜조와 함께 먹는데 분 팃 느엉은 느억맘(Nouc mam · 피쉬소스)을 뿌려 비벼 먹는다면 분짜는 면과 고명, 채소를 느억맘 소스에 찍어 먹는다는 게 차이점이다. 베트남 최남단 섬인 푸꾸옥에서는 이런 가느다란 분으로 크기가 작은 총알 오징어와 새우를 섞어 만든 어묵을 올린 오징어 쌀국수 분 꾸어이(Bun quay)를 낸다. 소스를 섞기 전 맑은 국물을 떠먹어 보면 희한하게 나주 곰탕 비슷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썰어낸 형태에 따라 다른 식감도 재미
토마토와 게살을 넣어 만든 반 깐 꾸아(Banh canh cua)
반깐(Banh canh)은 타피오카 가루나 쌀가루로 만든다. 각각의 가루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 둘을 섞는 게 대부분이다. 반깐은 두꺼운 일본 우동 면과 비슷하다. 앞서 말한 분보다 더 굵게 썰어낸 것이 많고, 타피오카 가루가 들어가 더 쫀득하고 탱글한 식감을 자랑한다.
토마토와 게살을 넣어 만든 반 깐 꾸아(Banh canh cua)도 한국인의 입맛에 딱이다. 한국식 중화요리인 울면 같은 국물에 게살과 토마토 등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돼지 뼈를 우려낸 육수에 닭 육수를 더하기도 하고, 이 국물에 게살을 부숴 넣고 전분을 풀어 꾸덕한 국물을 낸다. 새우나 생선으로 만든 어묵, 메추리알이나 선지 등을 고명으로 얹는다.
반깐(Banh canh)은 타피오카 가루나 쌀가루로 만든다. 각각의 가루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 둘을 섞는 게 대부분이다. 반깐은 두꺼운 일본 우동 면과 비슷하다. 앞서 말한 분보다 더 굵게 썰어낸 것이 많고, 타피오카 가루가 들어가 더 쫀득하고 탱글한 식감을 자랑한다.
토마토와 게살을 넣어 만든 반 깐 꾸아(Banh canh cua)도 한국인의 입맛에 딱이다. 한국식 중화요리인 울면 같은 국물에 게살과 토마토 등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돼지 뼈를 우려낸 육수에 닭 육수를 더하기도 하고, 이 국물에 게살을 부숴 넣고 전분을 풀어 꾸덕한 국물을 낸다. 새우나 생선으로 만든 어묵, 메추리알이나 선지 등을 고명으로 얹는다.
우리 당면보다 가는, 버미셀리 같은 쌀국수 후띠어우(Hutieu)
베트남 북부 하이퐁의 갈색 국수 반다(Banh da)
후띠어우(Hutieu)는 우리 당면보다 가는, 버미셀리 같은 쌀국수이다. 굵기로는 앞서 언급한 분의 가느다란 형태라 오인할 수 있지만, 분의 단면은 원형인 반면 후띠어우의 단면은 넓적한 사각인 게 차이이다. 후띠어우는 면의 종류인 동시에 음식의 이름이기도 하다. 남부 지역, 특히 호찌민시에서 즐겨 먹는다. 캄보디아 국수 요리가 변형됐다는 뜻을 담아 후띠어우 남방(Nam vang)이라 부르기도 한다. 돼지뼈로 우려낸 국물에 다진 고기와 새우, 선지 등을 고명으로 얹어 먹는다.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는 수제비 같은 식감의 두꺼운 국수 미꽝(Mi quang)을, 북부 하이퐁에서는 갈색 국수인 반 다(Banh da)를 시도해보자. 각 지역별로 식감도, 함께 곁들이는 재료도 다른 국수가 우리의 면식(麵食)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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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기자
2010년부터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베트남 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혔을 때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베트남을 오가며 조선일보 뉴스레터 <사이공 모닝>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두 얼굴의 베트남-뜻밖의 기회와 낯선 위험의 비즈니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