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시작, 메소포타미아 문명
밀은 쌀, 옥수수와 함께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로 세계인구의 30%가 밀을 주식으로 먹는다 한다. 밀은 기원전 8000~9000년 경 서아시아 지방에서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캅카스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000~4000년 경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메르인들이 야생 밀을 심어 본격적인 밀농업의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도 문명, 황하 문명은 세계 4대 문명으로 일컬어 지고 있다. 이들 고대문명은 거대한 강을 끼고 도시가 형성되었듯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이집트는 세계 최장의 나일강, 인도는 인더스강, 중국은 황하다.
그 중 밀과 가장 관련있는 고대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이곳을 흐르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각각 페르시아만을 향하다가 하류에서 합류한다. 이 두 강이 합류된 지점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되었다. 유프라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 이르면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이른다. 이곳에는 지금도 야생밀이 지천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역들은 바로 이 야생밀을 발견하고 밀을 경작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인류 최초의 밀 농사 였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밀농사는 대체로 까다롭지 않기에 밀 재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아나톨리아를 거쳐 그리스 등지 또, 인도와 중앙아시아 및 중국지역으로까지 온대지방의 세계 여러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곡식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밀과 함께 한 인류의 문화
밀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로 음식문화 자체가 밀과 함께 발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 도시국가를 건설하는 한편 대규모 수로를 만들고 관개를 통해 대단위 밀을 재배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농업을 시작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지력 관리에 실패하게 된다. 지하수에 소금이 많이 녹아 있었기에 비옥한 토지가 나중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불모지가 되었다. 이는 습윤지대와 건조지대의 중간에 있는 초원지대인 반건조지대에는 지하수에 소금이 많이 녹아 있어 흙에 소금이 축적되는 것을 막아야 했던 것을 몰랐기에 피할 수 없었던 인류의 실패한 농업실험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문명의 시작도 밀이며 문명의 몰락도 밀과의 관계가 대단히 밀접하다.
지도를 보면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이란 서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관통하는 큰 강들의 상류지역에 해당 함을 알 수 있다. 즉, 이 강들의 상류지역에 밀의 야생종이 밀의 경작을 유발하고 신석기 혁명을 일으켜서 재배지역이 자연적으로 강의 하류지역인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중심지로 전파됨으로써 문명의 개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집트 문명과 밀, 그리고 로마제국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이집트 문명을 꽃피운 아프리카대륙의 나일강은 달랐다. 나일강의 물은 소금기가 적고, 해마다 강가의 농경지에 엄청난 양의 새로운 침적토를 실어다 주었고 이집트의 농업은 수천 년간 매우 생산성이 높았다. 로마시대에는 로마제국을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 였으며 이집트는 오랫동안 로마황제의 직할지로 ‘특별관리’ 대상이 되었다.
서양역사에서 로마가 밀을 주식으로 한 이래로, 밀은 곡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로마에서는 밀이 부족하면 밀을 확보하려고 시칠리아와 이집트 등의 지중해 밀 산지에서 밀을 사들였고 로마의 정치인들은 시민에게 값싼 밀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로마는 과학보다는 실용적인 기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어떤 학자들은 로마의 기술발전 배경에 밀이 있다고도 한다. 밀 도정을 위한 기술개발이 다양한 분야의 기술적 진보로 확산되었다는 뜻이다. 밀은 낱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껍데기만을 따로 분리하기 어렵다. 말린 알곡을 통째로 부서뜨려 가루를 내고, 체에 걸러 껍데기를 제거하고 가루를 따로 모아야 한다. 순수한 배젖만 분리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밀의 제분은 집에서 손쉽게 처리할 수 없었으므로 제분 공장을 만들어 대규모 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력이나 동물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한층 유리했다. 도정 기구를 제작하고, 껍질과 가루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송풍 장치도 필요했다. 이렇게 밀의 도정과 제분 공정에는 수많은 과정과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밀가루는 주로 빵을 만드는 강력분, 국수와 전에 쓰이는 중력분, 과자와 케이크를 만드는 박력분으로 나뉜다. 글루텐이라는 단백질 함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경질 밀인지, 연질 밀인지도 글루텐 함량 차이를 내는 요소이지만 제분 과정에서의 배젖 부위에 따라 서로 차이가 난다. 이렇듯 용도에 맞는 밀가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공장에서 세심한 가공 공정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밀과 밀가루를 다루는 로마시대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져 오는 이탈리아인들의 음식과 요리 속에 남아 있다 하겠다. 피자와 파스타, 빵 대부분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도 많은 종류의 빵과 밀가루 음식을 즐기지만 이탈리아를 따라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폼페이의 제과점 패스트리움에서 사용한 화덕과 방아 아래 원추형 돌이 숫방아, 장구처럼 생긴 웃돌이 암방 아다. 로마시대 정치는 바로 이 풍족한 밀의 행복한 빵 냄새와 서커스 정치로 멸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의 전쟁사
밀은 쌀보다 보관, 휴대, 조리가 쉽다. 조리시에 물 필요량이 적으며 조리 시간도 짧다. 밀은 보관 기간도 쌀보다 길다. 밀의 이런 특성은 군사들의 기동력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이 지중해를 넘어 멀리까지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밀의 도움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빵이 간편성, 휴대 성, 보관성이 뛰어나 장기 항해에도 도움이 되었고 대항해시대 유럽의 전 세계에 진출을 뒷받침했다.
프랑스혁명의 시작 또한 밀가루였다. 1775년 파리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 났다. 빵집과 식료품점을 시작으로 군중들은 식량 창고를 습격했다. 사태의 직접적인 요인은 냉해와 작황 부진. 기록적 한파로 2년 연속 곡물 수확이 반감하며 식량 공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파리의 소요는 가라앉았지만 시위는 전국 각지로 번졌다. 빵과 밀가루를 요구했던 당시 시위가 얼마나 심했던지 ‘밀가루 전쟁(The Flour War)’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난해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세계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이 끊기면서 전 세계 물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재료비 상승 등으로 외식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4차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AI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도 인류에게는 식량이 가장 큰 변수를 차지한다. 오늘도 우리는 밀의 전쟁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2004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2005년 재정경제부 차관보, 2006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30여 년간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안정을 위해 헌신한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이다. 지은 책으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으며, <인사이트코리아>에 ‘김석동이 쓰는 한민족 경제 DNA’를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