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르네상스 시대, 송나라
송(宋)나라는 농업과 상업, 과학과 행정이 발달했던 옛 중국의 전성기였으며 북송과 남송을 합해 319년간(960 ~ 1279년)이어진 왕조이다. 북송의 수도인 하남성(河南省, 허난성) 개봉(開封,카이펑)은 오늘 우리가 알아볼 한·중·일 동북아시아 누들로드의 시작이다.
중국은 송대(宋代)에 부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시대에 농업의 발달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송나라 초기인 980년 610만 호, 1085년에는 1540만 호, 1102년 4550만 호, 1207년에는 8000만~9000만 호 수준으로 불어났다.
송나라는 유럽이 1800년대에 도달한 도시인구의 수준을 그 시대에 이미 만들었다. 송나라 한림학사였던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12세기 수도 개봉(開封,카이펑)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 작품이다. 가로 5m가 넘는 규모 또한 매우 큰 그림으로서 송나라 수도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그림에 묘사된 당시 도시는 많은 사람과 마차, 수레로 활기차게 붐빈다. 상점이나 장터의 종류, 거래하는 모습 등이 생생하다. 서남아시아 상인들의 낙타도 등장하는데 송나라에서 국제무역도 활발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분식의 나라 국수의 천국, 송나라
중국의 음식이야기는 문화와 경제번영의 르네상스시대라 일컬어지는 송나라로 시작해 송나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장과 조 대신 쌀과 밀이 중국인의 주식이 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이 때부터 다양한 종류의 밀가루 음식, 국수와 만두가 화려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 문헌에서 국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의 종합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나오는 ‘수인병(水引餠)’이다. 또한, 한나라 시대에는 반죽해 길게 뽑아 삶아 만드는 ‘탕병(湯餠)’과 쪄서 만드는 ‘증병(蒸餠)’을 많이 먹었다. ‘면(麵)’이라는 글자가 ‘병(餠)’이 아닌 ‘국수’만을 일컫게 된 것은 송(宋)대에 이르러서다.
북송 때 고대도시의 민족, 역사, 문화와 다양한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은 음식문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으며 당시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 카이펑)에서 먹었던 다양한 국수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개봉은 인구가 150만 명으로 상공업 종사자가 매우 많은 도시였다. 이들이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음식으로 국수가 제격이었으며 이것이 외식문화의 발달로 이어졌다. 당시에 이미 음식 배달문화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송나라에서 고려로, 국수가 냉면으로
우리나라는 월성 유적이나 백제 군창지 등에서 탄화된 밀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이미 밀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헌상 우리나라에 국수가 등장한 것은 고려 때로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까지 우리 문헌에서는 국수를 찾아볼 수 없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10여 종류의 음식 중 국수 맛이 으뜸(食味十餘品而麵食爲先)”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를 근거로 고려시대와 송나라 교류를 통해 국수가 들어왔을 것이라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제례에 면을 쓰고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는 기록은 고려시대에 국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에는 밀이 적어 화북지방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밀가루의 가격이 비싸서 잔치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국수의 전형(典型)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지만 재료가 귀해 밀가루가 아닌 메밀가루가 주(主) 재료인 냉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메밀은 밀가루처럼 글루텐 성분이 없어 반죽도 어렵고 국수로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국수틀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냉면이 고려의 국수가 아니었을까? 논농사를 하기 힘든 산간지역이 많고 강수량이 적은 곳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은 재배기간이 짧아 흉년과 농사를 망친 해에 우리 민족을 먹여 살린 고마운 작물이다. 메밀로 면을 뽑고 고기육수나 동치미육수에 말아먹던 음식으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안타깝게도 고려시대의 음식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학자들 대부분은 송나라와 고려시대를 국수로 연결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보물 1호라 불리는 송나라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사진 같은 그림으로 당시 송나라 수도의 온갖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자 최고의 기록으로 손꼽히고 있다.
송나라에서 일본으로, 국수가 우동으로
당왕조 멸망(907년) 후 오대십국시대가 끝나고 북송(北宋)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일본과 북송 사이에 사무역이 계속되었다. 그런 교역 속에서 일본에도 국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쇼이치 국사는 중국의 국수문화를 일본에 전파했다고 하며 후쿠오카에 있는 죠텐지 사원에는 기념비석이 남아있다. 1241년 송나라 유학을 통해 ‘수마도’라는 수차와 톱니바퀴를 이용해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 설계도와 함께 국수를 일본에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한편 국수에 무를 갈아 넣는 조리법은 13세기에 승려들을 통해 중국에서 수입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에 들여온 사찰의 麵(면)은 우동이라 했다. 우동은 냄비에 한꺼번에 많이 끓여서 여럿이 먹을 수 있는 면이다. 메밀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끓일 수 없어 단체식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사찰에서도 면은 고급음식이자 특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국수가 서민음식이 되기까지는 많은 도구가 개발되고 제면 기술 발전도 함께 이루어져야 했었다. 치대고 밀고 써는 삭면은 비교적 공정이 간단한데도 일본에서 대중화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흘러서였다. 이유는 바로 맷돌과 밀판이었다. 석공과 목공이 동시에 발달되어야 널리 보급될 수 있는 것이 우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우동의 대중화가 늦어졌고, 동시에 소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에도시대에 이르러 관동지방의 소바가 우동을 이겼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관서지방의 우동과 관동지방의 소바는 역사 속에서 음식에도 힘의 논리가 스며든 또 하나의 케이스가 아닐까?
쇼이치 국사 (1202~1280). 일본으로 수차와 밀가루 제분 설 계도를 들여와 일본에 국수를 전 파.후쿠오카 죠텐지사원에 기념비석이 남아있다.
이렇게 송나라에서 시작된 국수는 이어서 고려와 가마쿠라 막부시대 일본으로 흘러 지금의 찬란한 한·중·일 삼국의 동북아시아의 면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사찰과 승려를 통해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麵(면)식 문화는 지금은 화려한 동양의 음식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유럽과 서양인들에게 Far East라고 불릴 만큼 먼 나라로 불리고 있지만 그 누들로드를 따라 이탈리아의 파스타가 되었듯이 K-Food가 세계화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세계인들의 K-Food 열광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K-Noodle이 그 몫을 단단히 해내기를 기대해 본다.
글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2004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2005년 재정경제부 차관보, 2006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30여 년간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안정을 위해 헌신한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이다. 지은 책으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으며, <인사이트코리아>에 ‘김석동이 쓰는 한민족 경제 DNA’를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