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한국 식문화 역사에서 아주 오랫동안 국수는 메밀로 만드는 음식이었다. 밀가루 국수가 대세가 된 건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1960년대부터로 약 50년에 불과하다.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밀은 덥고 습한 여름과 매섭게 추운 겨울을 가진 한반도 자연환경과 잘 맞지 않았고 많이 재배되지 않았다. 귀하고 비싸서 ‘금가루’라고 불릴 정도였다. 6·25가 끝나고 미국이 밀가루를 원조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밀가루가 흔하고 싸졌다. 반면 기후나 토질을 그리 따지지 않는 ‘성격 좋은’ 메밀은 한반도 전역에서 잘 자랐고,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주로 메밀로 뽑은 국수를 즐겼다.
메밀로 만든 국수 중 대표적인 것이 막국수와 평양냉면이다. 지금이야 두 국수가 별개로 구분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평양의 명물 냉면 먹고 1명 사망 10명 중독’이란 제목의 1934년 7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소위 막국수(黑麵)를 먹고 8명이 중독된 사건’이라고 나온다. 냉면과 막국수를 같은 음식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에서는 메밀을 겉껍질이 붙은 채 ‘마구’ 빻은 가루로 만들면 막국수, 껍질을 제거한 메밀로 뽑으면 냉면 또는 국수라고 불렀다. 평양에서는 막국수를 면발이 시꺼멓다 하여 ‘흑면(黑麵)’이라고도 불렀다.
막국수는 겉껍질과 속메밀을 섞었다는 뜻과 함께 ‘방금’ 만들었다는 의미도 있다. 강원도 화전민들은 손님이 오면 메밀을 절구에 빻아 바로 만들어 내어 대접하는 귀한 음식이었다. 막국수가 거무튀튀하기만 한 게 아니라 뽀얗게 아이보리 색을 띄기도 하는 건 그런 이유다.
누가 뭐래도 막국수는 강원도의 국수다. 화전민들이 주로 먹었다. 6·25 이후 막국수를 파는 식당이 등장했고, 1970년대 소양강댐 공사로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들이 싸고 맛있는 막국수에 반했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강원도 군부대에서 군생활을 한 남성들과 MT 온 대학생들의 입소문을 타고 강원도를 넘어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다. 1981년 ‘국풍81’에서 막국수가 춘천의 대표 음식으로 소개되면서 막국수는 강원도 특히 춘천의 맛으로 자리잡았다.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는 춘천 막국수 집을 경쟁적으로 소개했고, 1995년부터 춘천 막국수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강원도는 지역별로 막국수 맛이 천차만별 다양하다. 하지만 영동이 겉껍질과 속메밀을 섞어 뽑은 ‘겉메밀 면발’인 반면, 영서는 뽀얀 메밀 속가루만을 가지로 만든 ‘속메밀’ 면발’로 크게 구분된다.
춘천
막국수 메카다. ‘샘밭막국수’ ‘남부막국수별과’ ‘유포리막국수’ 등 막국수 전문점이 150개가 넘는다. 기본적으로 화전민이 먹던 스타일이 기본이다. 비빔 막국수를 기본으로 하고 육수가 담긴 주전자를 따로 낸다. 손님이 원하면 육수를 비빔 막국수에 부어 매콤새콤한 국물을 즐길 수 있다. 국수는 겉메밀을 사용하지 않고 속메밀 가루에 밀가루 전분을 30%쯤 섞어 쫄깃한 탄력과 매끈함을 더한다. 육수는 사골 국물과 동치미를 섞는 경우가 많다. 배추김치를 양념장이나 고명으로 쓰는 집도 꽤 된다.
인제·원통
막국수 대신 메밀국수, 메밀국수라는 말을 흔히 쓴다. 밀가루를 전혀 섞지 않은 100% 속메밀가루로 뽑은 흰 면발에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하고, 양념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춘천과 다르다. 동치미만을 사용해 깔끔하고 순한 맛이 특징이다. 평양냉면과 맛과 모양이 비슷해 실향민들도 자주 찾는다. ‘남부면옥’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식당이다. 남북리에서 1950년대 영업을 시작해 소양강댐 공사로 남북리가 수몰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기 오래된 가게다. ‘서호순모밀국수’도 이름난 노포(老鋪)이다.
고성
고성 사람들은 막국수보다 ‘토면(土麵)’이라고 더 흔히 부른다. 검은 흙과 닮았단 뜻으로, 국수에 겉메밀이 많이 들어간 탓이다.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한다. 금강산 불교 사찰에서 이 지역 막국수가 시작됐기 때문에 고기 육수를 쓰지 않고 동치미 국물만을 쓰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메밀 겉껍질 함량이 높아 면발이 툭툭 끊어진다. ‘백촌막국수’는 고성의 막국수집들뿐 아니라 전국의 막국수 식당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태 식해를 꾸미로 올린다. 명태 식해는 속초 ‘함흥냉면옥’에서 개발한 뒤 퍼진 음식이다. 함경도에서는 가자미식해를 즐겨 먹었다. 이남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이 더 구하기 쉬운 명태로 식해를 담가 함흥냉면에 올렸는데 막국수에도 올라가게 됐다.
양양
양양의 막국수는 겉메밀이 들어간다는 점은 같지만, 산간 지방과 해안 지방이 크게 다르다. 산간 지역 막국수는 ‘영광정 메밀국수’와 ‘실로암 메밀국수’가 대표적이다.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고 양파를 갈아 넣은 매콤한 양념장을 얹는다. 강원도는물론 전국적으로 유행한 막국수 스타일이다. 해안지역은 ‘간장 막국수’다. 사골 육수에 간장으로 간 한다. ‘송전메밀국수’가 있는 송전마을이 유명하다.
주문진
비빔 막국수가 대세다. 꾸미로 가자미식해를 사용해 쌉쌀한 맛이 난다. 물막국수는 주로 간장 막국수 스타일인 건 양양의 영향이다. ‘신리면옥’이 주문진의 이름 난 막국수집이다.
강릉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한다. 설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설탕을 더해 단맛이 강하다. ‘삼교리동치미막국수’에 가면 강릉 막국수의 전형을 맛볼 수 있다.
원주
원조는 육수가 고기 맛이 강하다는 점이 강원도의 다른 지역들과 차이난다. 경기도와 가까워서일까. 겉메밀이 섞인 면발을 주로 사용한다. ‘남경막국수’가 유명하다. 원주에서 조금 떨어진 황둔에도 ‘황둔막국수’ 등 막국수 명가가 많다.
봉평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지역답게 메밀을 즐겨 먹어왔고, 이름 난 막국수집도 많다. 겉메밀이 섞인 면발을 주로 낸다. 국물은 채소와 과일을 넣어 산도와 단맛이 강하다. 양배추, 상추 등을 고명으로 쓰는 것도 독특하다. ‘현대막국수’ 등 이 지역의 막국수집들은 메밀전도 같이 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막국수는 평양냉면과 마찬가지로 늦겨울부터 초봄에 가장 맛있다. 메밀의 수분이 적당히 빠져나간데다 국물의 핵심 요소인 동치미가 가장 맛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막국수나 평양냉면이나 여름에 무더위를 잠시 잊기 위해 먹는 음식으로 인식된다. 물론 냉장기술이 발달되어 제철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올겨울에도 꼭 맛보고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보길 권한다.
글 조선일보 김성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