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병(胡餠)에서 면식(麵食)으로
오늘날 중국대륙과 세계 각 곳에 사는 중국인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가장 즐겨 먹는 사람 중 으뜸이다. 그런데 예수가 태어나기 전인 ‘서기 전’만 해도 그들은 ‘밀’이란 곡물을 알지도 못했다. 특히 서안(西安)에서 산둥(山東)반도로 이어지는 황하 유역에 살던 사람들은 주식으로 보리를 먹었다. 보리의 한자는 ‘대맥(大麥)’이다. 서기 후 밀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서북부로 전해지면서 보리와 구별하여 밀의 한자를 ‘소맥(小麥)’이라고 불렀던 이유도 밀이 보리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호병(胡餠)은 서역에 사는 호인(胡人)들의 떡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진 음식으로
후한 시대의 많은 왕과 귀족의 식탁에 올랐다.
호병의 유행을 이끈 호식천자
서기 후 중국 북방의 낙양(洛陽)과 서안 일대에 있었던 나라는 ‘후한(後漢)’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귀하게 구해온 밀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은 당연히 황제와 지배층이었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자신이 황위에 오르기 전에 밀가루 음식을 주었던 사람을 잊지 않고 높은 관직과 엄청난 녹봉을 주었다. 후한 사람들은 밀이 북방의 오랑캐 ‘호(胡)’가 전해주었기에 밀로 만든 음식을 모두 ‘호병(胡餠)’이라고 불렀다.
‘병(餠)’이란 한자는 본래 곡물가루로 만든 음식을 가리키는 글자였다. 그런데 후한 이후 지배층에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자 ‘호병’이란 단어가 생겼다. 호병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만두(饅頭)와 빠오즈(包子)와 같이 스팀으로 찌는 호병은 ‘증병(蒸餠)’, 국수나 수제비처럼 뜨거운 물에 넣고 삶는 호병은 ‘탕병(湯餠)’, 불에 구워서 익힌 호병은 ‘소병(燒餠)’ 혹은 ‘노병(爐餠)’, 기름에 튀긴 호병은 ‘유병(油餠)’, 그 속에 깨를 넣은 호병은 ‘마병(麻餠)’이라고 불렀다. 모양을 두고 이름이 붙여진 호병도 있었다. 돼지의 귀 모양은 한 호병은 ‘돈이(豚耳)’, 개의 혀 모양 호병은 ‘구설(狗舌)’, 새끼 모양의 호병은 ‘색병(索餠)’, 둥근 모양의 호병은 ‘환구(環具)’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도시에서의 면식 유행
호병은 12세기 중국의 왕조였던 송나라에 들어와서 ‘밀가루’라는 한자가 붙은 ‘면식(麵食)’이라 불렸다. 송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족이 주류였던 당나라와 남북조시대 이후에 세워진 왕조다.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송나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밀가루 음식을 주식으로 먹기 시작했다.
북송의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시(開封市)에 변경(汴京)이란 이름으로 도읍을 정했다. 당시 변경의 인구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변경 사람들은 지금의 도시인처럼 음식을 사서 먹었다. 변경에는 주점 말고도 밥집·국집·혼돈점·호병점 등이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호병점에서 판매했던 메뉴 중에는 새로 개발된 음식도 적지 않았다. 가령 오동나무 껍질 속의 섬유질을 말려서 갈아 밀가루와 함께 반죽하여 만든 국수인 동피면(桐皮麵), 돼지고기 편육을 넣은 국수인 삽육면(揷肉麵), 수제비처럼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서 펄펄 끓는 물에 넣고 삶은 국수인 대오면(大燠麵) 등이다.
변경에 도읍은 둔 송나라는 1127년 북방의 여진족의 금나라 침입을 받아 멸망한다. 이후 양쯔강 남쪽으로 이동한 송나라 황족이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인 임안(臨安)에서 다시 송나라를 세운다. 역사학에서는 앞선 송나라를 북송, 뒤의 송나라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임안(臨安)은 7세기 수나라가 건설한 강남 대운하의 종점이 되면서 발전이 시작되었다. 남송 때 임안(臨安)이라고 개칭하여 남송의 임시수도가 되어 북송의 수도 개봉에 못지 않은 번영을 누렸다. 원나라 때에는 마르코 폴로 등에 의해 킨자이(Khinzai) 등의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으며 지금의 항저우가 바로 그 당시 임안이다. (사진은 지금 항저우의 서호와 뇌봉탑, 항저우 현재 도심이 호수 건너편에 멀리 보인다.)
면식이 바꾸어 놓은 젓가락 위주의 식사
임안의 면식점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임안 사람들은 북송 때 곡물로 지은 밥과 국을 먹을 때 사용했던 숟가락을 버리고, 젓가락만으로 식사하기 시작했다. 국수와 만두와 같은 밀가루 음식이 주식이 되면서 생긴 변화였다. 오늘날 중국인은 젓가락을 ‘콰이즈(筷子)’라고 부른다.
명나라 사람 육용(陸容)은 본래 ‘주(箸)’였던 젓가락의 이름이 ‘콰이즈’로 바뀐 사연을 글로 남겼다.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일대였던 오중(吳中) 사람들은 ‘주(箸)’와 ‘주(住)’를 같은 발음으로 말했다. 이곳에는 하천이 많아 배를 타고 생업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젓가락을 가리키는 ‘주(箸)’를 말했다가, 혹여 배가 멈추어 서는 ‘주(住)’가 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아예 젓가락을 뜻하는 ‘주(箸)’를 ‘콰이즈(快子)’로 바꾸어 버렸다.
특히 남송 이후 대도시의 면식점에서는 값이 싼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손님들에게 제공했다. 그러자 ‘쾌(快)’란 한자 위에 대나무 죽(竹)을 덧붙여 ‘콰이즈(筷子)’라고 썼다. ‘콰이즈’는 빨리 먹는데 쓰는 도구라는 뜻도 있다. 면식의 유행은 주식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식사 도구까지 바꾸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중국 면의 세계다.
중국에는 상저옥배(象箸玉杯)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이는 상아로 만든 젓가락과 옥으로 만든 잔 이라는 뜻으로 한비자 제 21편에 보면 상아 젓가락이 나라를 망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은나라 최후의 왕이었던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흙으로 만든 국그릇이 마음에 들 지 않을 것이고 국그릇을 옥으로 만들겠지. 그러면 옥그릇에 든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 거기에 만든 곰 발바닥이나 표범 같은 음식을 구해 오라 할 것이오. 그리고 사는 집도 더 화려하고 큰 집으로 바꾸라 할 것이오. 입고 있던 옷은 좋은 비단으로 만들라고 지시할 것이오. 군주가 그런 것에 자꾸 신경 쓰면서 국민들을 못살게 할 것이기 때문이오.”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싶지만 실제로 주왕은 은나라 최후의 왕이 되었으니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다.
글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음식을 문화와 역사학, 사회과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음식인문학자. 문화인류학(민족학) 박사.
《음식 인문학: 음식으로 본 한국의 역사와 문화》(2011), 《식탁 위의 한국사: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2013, 베트남 및 일본에서 번역출판),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식사 방식으로 본 한국 음식문화사》(2018, 타이완에서 번역출판), 《조선의 미식가들》(2019), 《백년식사: 대한제국 서양식 만찬부터 K-푸드까지》(2020), 《음식을 공부합니다》(2021), 《그림으로 맛보는 조선음식사》(2022, 중국에서 번역출판), 《분단 이전 북한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 일제강점기 북한 음식》(2023), 《글로벌푸드 한국사》(2023)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