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냉면(冷麵)이라는 단어는
조선 중기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 1558년 4월 20일 조에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냉면을 먹었더니 발바닥이 차갑다’(寢覺, 乃啗冷糆, 足掌寒矣)는 말 속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냉면 이전에 냉면을 뜻하는 단어인 냉도(冷淘)가 고려말 이색의 시 ‘하일(夏日)의 즉사(卽事)’에 처음 등장한다. 냉도는 냉도면(冷淘麵)으로 말이 변하고 찬물에 씻는다는 뜻의 ‘도’자가 빠지면서 냉면이란 말로 변한다. 조선시대 내내 평안도의 명물이던 평양냉면과 함경도의 농마국수는 해방 이후 실향민들의 이동과 함께 남한에서 꽃을 피운다. 서울의 평양냉면은 현존 최강의 맛을 자랑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실향민 중심의 음식에서 전국민의 음식이 되었고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전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차가운 육수에 면을 말아먹는 한국인만의 고유 냉면 문화는 K-food의 한 축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평양냉면 ⓒ통일뉴스
평양·평안도
1911년 이미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이 생길 정도로 냉면은 평양의 대중적인 외식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는 ‘냉면의 나라’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냉면은 겨울의 일상 음식이었다. ‘쨍’한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꿩고기를 다양하게 섞은 국물에 메밀면을 넣어 먹는 냉면의 원조다.
북한 량강도 혜산시에 위치한 식당 압록각에서 판매하는 농마국수 [자료사진-통일뉴스]
함경도
환경적으로 감자나 고구마 같은 작물이 많은 탓에 이 전분을 이용한 ‘국수’는 대중화 되었다. 감자 전분 면발에 식초로 삭힌 가자미회를 얹고 고춧가루, 마늘 등으로 만든 양념을 한 ‘회(膾)국수’나 돼지고기를 얹은 ‘육(肉)국수’를 동시에 있었다. 산간 지역 양강도에서는 들깨국수가 바닷가 흥남지역에서 회국수를 많이 먹었다. 현재 북한에서는 국물 없는 회국수보다 국물이 있는 ‘감자농마국수’를 더 즐겨 먹는다.
황해도식 냉면
황해도
황해도는 해방전부터 곡물 생산의 중심지였다. 같은 물냉면이지만 황해도 냉면은 평안도보다 면발이 굵고 돼지고기 육수를 많이 사용해 진한 고기 맛을 기본으로 하면서 간장과 설탕을 넣어 단맛이 난다. 사리원의 냉면가게들은 1928년 4월 21일에 7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면옥노동조합’을 결성할 정도로 크게 성장한다. 또다른 전분 면인 한국의 당면도 황해도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평양냉면
#필동면옥 #평양면옥 #우래옥 #을지면옥
조선시대 후기부터 서울의 냉면 기록이 남아있다. 평안도가 겨울에 냉면을 먹은 반면 서울의 냉면은 여름 별식이었다. 서울식 냉면집들은 분단과 전쟁 이후 대거 내려온 평안도 사람들이 만든 냉면집들에 밀려 사라진다. 평안도 출신들이 운영하는 서울의 평양냉면집들은 재료와 기후의 차이 때문에 육수는 평안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동치미 국물 대신 주로 서울의 기본 국물인 소고기 양지 육수를 사용하게 된다. 현재 서울의 평양냉면은 세계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맑은 양지육수를 우려낸 을지면옥의 냉면 ⓒ 박정배
서울 함흥냉면
#함흥곰보냉면 #후남집 #오장동함흥냉면
함경도 사람들은 중부시장과 청계천 오장동 부근에 자리 잡았고 1953년에 ‘오장동함흥냉면’이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서울에서 함흥냉면의 질긴 역사가 시작된다. 전성기 때는 오장동에만 20여 개의 함흥냉면집이 있었다.
함흥냉면으로 유명한 오장동 중부시장 라인 ⓒ 박정배
인천·백령도
#부평막국수(백령도식) #변가네 옹진냉면(백령도식) #원조할머니냉면(세숫대야 냉면)
인천에는 1936년에는 ‘냉면배달조합’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나올 정도로 냉면은 상당히 보편적인 외식이었다.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사람들이 백령도를 거쳐 인천으로 옮기면서 백령도식 황해도 냉면이 전성기를 맞는다. 인천의 백령도식 냉면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에 까나리 액젓을 넣어 진한 단맛이 난다.
인천 화평동에는 ‘화평동 냉면골목’이 있다. 1970, 80년대 이곳 부근에는 전국 최대의 목재가구단지와 제철소 등이 밀집해 있었는데, 이들 노동자를 대상으로 대략 스무 곳의 냉면집이 골목을 이뤘다. 그릇만도 직경 27㎝. 일반 냉면 그릇의 2, 3배가 넘고 한 그릇 무게만도 2㎏ 정도를 넘길 정도여서 일명 ‘세숫대야 냉면’으로 불린다. 면 위에는 시큼하게 삭은 열무김치가 올라간 것이 특징이다.
인천·백령도식 냉면 ⓒ 박정배
옥천(양평)
#황해냉면 #옥천냉면
옥천은 ‘황해도식’ 혹은 ‘해주식’ 냉면 문화가 꽃피운 곳이다. 1952년 황해도 출신의 이건협씨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서 ‘황해냉면’이란 이름을 걸고 시작한 후 현재는 예닐곱 개의 냉면집들이 성행하고 있다. 황해도식 냉면은 면발이 굵고 돼지고기 육수에 간장이나 설탕으로 간을 해서 단맛이 강하게 나는 것이 특징이다.
옥천냉면 ⓒ박정배
의정부·동두천
#의정부평양면옥
1952년부터 미군 기지가 주둔하면서 의정부·동두천 일대에는 실향민들이 정착하게 된다.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물품과 미군의 보호라는 이유 때문에 미군기지 근처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몰렸다. 평양 출신 실향민이 1953년에 창업한 동두천 ‘평남면옥’은 평양 장터의 냉면을 파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얼음이 가득한 육수는 서울 마포의 ‘을밀대’와 닮았다. ‘의정부평양면옥’은 1·4 후퇴 때 평양에서 피란 온 홍진권씨가 1970년 경기도 전곡에서 냉면집을 창업했다가 1987년 의정부로 옮겨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서울의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이 홍씨의 딸들이 운영하는 집들이다. 양지머리를 삶아 기름을 걷어낸 후 차게 숙성시킨 육수에 약간의 동치미 국물을 더하고 고명으로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이 의정부 평양면옥 계열 냉면집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의정부평양면옥 ⓒ박정배
평택
#고복수평양냉면
1951년에 피란민 수용소와 미군 기지가 평택에 들어섰다. 평안도·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평안도식 냉면이 자리 잡는다. 평남 강서에서 냉면가게를 운영하던 실향민이 1953년 ‘강서면옥’을 시작한다. 강서면옥은 1958년 서울로 이전했다. 일제 강점기에 평안북도 강계에서 ‘중앙면옥’을 운영하던 고학성씨의 아들이 1974년 ‘고박사냉면’을 개업한다. 강서면옥과 고박사냉면은 모두 양지머리와 사태살을 삶아낸 육수를 기름을 제거해 맑게 한 후 동치미 국물을 섞고 간장을 살짝 쳐 엷은 갈색이 도는 육수를 만든다. 메밀 70%, 감자 전분 30%의 비율로 만든 매끈한 면발도 평택냉면의 특징이다.
고복례냉면(구 고박사냉면) ⓒ박정배
대전
#숯골원냉면
평양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가문의 후손인 박근성씨가 6·25 때 월남해 평안도 출신 피란민들이 자리 잡은 대전 숯골에서 ‘숯골원냉면’을 창업한 것이 대전 평양식 냉면의 시작이다. 메밀을 이용한 면발과 닭육수와 동치미를 섞은 육수를 사용한다. 이후 집안 사람들이 대전에서 잇달아 냉면집을 창업하면서 숯골원냉면 식의 평양냉면이 자리 잡게 된다.
숯골원냉면 ⓒ박정배
대구
#대동면옥 #부산안면옥
1951년 평양 실향민이 창업한 ‘강산면옥’이 대구 최초의 평양식 냉면집이다. 1960년대 중후반 평양 냉면집 ‘안면옥’ 창업주의 아들이 ‘대동면옥’을, 1969년에는 ‘부산안면옥’이 부산에서 옮겨오면서 냉면이 대구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다. 대한민국에 정착한 뒤로는 더운 날씨와 재료 탓에 소고기 양지를 중심으로 끓여낸 맑은 육수에 간장으로 단맛을 더하고 식초를 조금 쳐 동치미같이 신맛이 약간 감도는 맛을 내는 것이 대구식 평양냉면의 특징이다.
대동면옥 ⓒ박정배
풍기(영주)
#서부냉면
경북의 내륙 풍기는 경상북도에서 실향민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다. 실향민들이 견직물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음식 문화도 발전한다. 덩달아 평양식 냉면집들도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견직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냉면집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지금 풍기를 대표하는 ‘서부냉면’은 평북 운산 출신의 창업주가 1973년에 문을 연 집이다. 고향 평안도에서는 육수로 꿩과 돼지고기로 국물을 냈지만 경상도 사람들이 싫어한 탓에 지금 같은 소고기 육수가 만들어졌다.
서부냉면 Ⓒ앙꼬를안고
부산 냉면
#부다면옥 #내호냉면 #백일평냉
해방과 전쟁 때 함경도 분들의 이주로 시작된 부산의 냉면 문화는 ‘밀면’으로 변형된 형태로 꽃을 피운다. 1950년대에 개업한 밀면의 원조집 내호냉면은 여전히 함경도식 냉면을 팔고있다. 1953년에 시작한 원산면옥은 가오리를 얹은 함흥냉면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들어 본격적인 평양냉면 집들이 등장하고 있고. 미쉐린 가이드 부산 2024에 부다면옥이 선정되면서 부산의 평양냉면 시대가 열리고 있다.
부다면옥 ⓒ 박정배
진주·사천
#하연옥 #재건냉면(사천)
진주냉면은 조선시대 말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옥봉동을 중심으로 ‘은하식당’, ‘평화식당’ 같은 냉면집이 6~7개 있었지만 60년대 말에 거의 맥이 끊겼다가 2000년대 초에 해물 육수를 기본으로 소고기나 돼지고기 육전을 꾸미로 올리고 메밀에 고구마 전분을 섞은 면을 사용한 물냉면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진주냉면 ⓒ 박정배
속초·양양
#함흥냉면옥(속초) #대포면옥(양양)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은 1951년 이후 고향과 가장 가까운 속초로 모여들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이던 청호동과 건너편인 중앙동, 금호동에 피란민들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함흥냉면집으로 알려진 함흥 출신이 세운 ‘함흥냉면옥’은 1951년 중앙동에 자리를잡고 영업을 시작했다. 함흥냉면옥은 ‘속초식’ 함흥냉면을 만들어냈다. 고향과 다른 환경과 재료 때문에 면의 주재료였던 감자 전분이 고구마 전분으로 변했고, 냉면의 성격을 결정하는 꾸미가 가자미회에서 명태회로 바뀌었다. 속초 사람들은 함경도식 냉면을 ‘속초냉면’이라고도부른다.
함흥냉면옥 ⓒ 박정배
글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음식 역사 문화 연구자
한·중·일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저서로 《음식강산 1, 2, 3》 《한식의 탄생》 《만두》 등 다수가 있다. 《조선일보》에 <박정배의 한식의 탄생> <음식의 계보> 〈박정배의 미식한담> 등을 연재했고, 《중앙일보》에 <박정배의 시사음식>을 연재하고 있다.
KBS 1TV <밥상의 전설>과 <대식가들>, SBS PLUS <중화대반점>에 고정 패널로 넷플릭스 <한우 랩소디>, <냉면 랩소디> 등에 자문 및 출연했다. <소고기의 모든 것> <국물연구회> <국수학교> <음식 글쓰기> 강좌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