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칼국수부터 브랜드 칼국수까지
밀가루가 귀하던 시절, 밀 수확기인 여름 즈음에나 맛볼 수 있었던 칼국수는 귀한 별미 요리였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밀가루가 흔해 지면서 어느 집에서나 언제든지 쉽게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식단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이들이 과거 어머니가 별미로 만들어 주시던 음식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칼국수는 여름 음식이었는데 북쪽 지방에서는 추운 겨울에 찬 냉면을 먹고 남쪽 지방에서는 더운 여름에 뜨거운 칼국수를 먹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홍두깨 방망이라 불리는 칼국수 밀대가 하나씩은 있었다. 방안 아랫목에 앉아서 밀가루를 반죽해 넓게 펴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얼굴에 밀가루 묻혀보던 시절, 부엌에서 멸치국물 냄새가 솔솔 풍기는 그 따스함이 생각나는 음식이 칼국수다. 하지만 이제 는 할머니나 어머니의 칼국수는 점점 사라지고 있어 옛 맛을 살리는 노포 칼국수집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돈의 많고 적음이 행복을 좌우하지 않듯이 가격의 높고 낮음이 음식의 맛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비싸지 않고 맛깔스러운 단품 메뉴로 행복한 한 끼 식사를 즐기는 것은 분명 생활의 작은 기쁨일 것이다. 내가 칼국수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박하고 담백한 국수 한 그릇이 주는 행복말이다. 칼국수를 잘한다고 입소문이 난 가게들이 동네 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대통령이 다니던 칼국수 집들도 있다. 이들 가게들은 각각 다양한 면, 국물, 고명 등으로 자기만의 맛을 자랑하고 있다. 상상만해도 푸근하고 따뜻한 맛이 느껴진다. 지금은 칼국수를 만드는 브랜드들이 있다. 그 맛도 일품이다. 이제는 다양한 칼국수의 맛을 집에서 손쉽게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육지와 바다의 생물, 하늘을 나는 조류까지
칼국수 기본적인 조리법은 비교적 간단해 집에서도 쉽게 요리할 수 있다. 먼저 밀가루를 반죽하여 도마 위에서 방망이로 얇게 민 다음 칼로 가늘게 썰어서 면을 만든다. 그리고 사골, 멸치,닭, 해물 등으로 국물을 내고 감자 애호박 등을 면과 함께 넣어끓여 식성에 따라 계란지단, 김가루 등 고명을 얹으면 완성이다. 이렇게 칼국수는 면을 따로 삶지 않고 육수에 바로 넣고 끓이는 제물국수라는 점이 잔치국수와 다르다. 제물국수는 국물에 삶을 때 묻은 밀가루를 잘 털어내야 국물이 걸쭉해 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입맛이 별로 없을 때나 메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언제 선택해도 후회가 없는 음식이 칼국수다.
칼국수는 재료 사용에 따라 다채로운 변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칼국수 국물에 따라 쇠고기칼국수, 닭칼국수, 꿩칼국수, 해물칼국수, 장칼국수, 사골칼국수 등이 되고 팥칼국수, 들깨칼국수, 매운탕칼국수, 추어탕칼국수, 김치칼국수, 육개장칼국수, 버섯 칼국수, 은어칼국수로도 변신한다. 면에는 밀가루 이외에 콩, 메밀, 찹쌀, 칡, 뽕, 쑥, 감자, 시금치, 녹차, 부추, 녹두, 늙은 호박 등을 넣어 다양하게 변주가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해산물이 주 재료인 칼국수는 메인 식자재에 따라 다시 분류되기도 한다. 멸치칼국수, 바지락칼국수, 낙지칼국수, 물총(조개 사용)칼국수, 보말칼국수, 매생이칼국수, 미역칼국 수, 문어칼국수 등 해산물과 채소가 어우러져 입안에 감칠맛 잔치가 벌어진다. 육지와 바다의 생물, 하늘을 나는 조류까지 안 어울리는 재료가 따로 없을 정도로 칼국수는 맛도 영양도 컬러 도 담음새도 색다르게 연출할 수 있는 우리네 면요리다.
강릉의 장칼국수 © 은나라
제주도 보말칼국수
겨울 별미 팥칼국수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전 세계의 식탁까지
일본인의 소울푸드가 우동이고, 이탈리아인의 소울푸드가 파스타라면 한국인의 소울푸드는 단연코 칼국수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면요리가 세계 각국에서 개인기를 펼치며 자리 잡고, 베트남과 태국의 쌀국수는 프랜차이즈 사업이 되어 우리의 외식문화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일본 우동은 그들이 자랑하는 대표적 식문화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파스타는 전 세계 누구나 즐기는 면요리가 되었다. 우리가 만들어 오고 지켜왔던 문화가 담겨진 한 그릇의 칼국수도 세계인의 식탁을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칼국수가 다른 나라의 식재료들과 만나어떻게 변주되고 발전될 지 궁금하다.
세계인에게 자랑하고 싶은 K-푸드, 칼국수! 이제 시작이지만 시작이 반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함께 참여하기를 기대해본다.
찬바람 부는 요즘, 칼국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칼국수는 한 끼 식사의 행복을 누리면서 우리 정서를 함께 맛볼 수 있는 메뉴가 아닐까 한다.
글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2004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2005년 재정경제부 차관보, 2006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30여 년간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안정을 위해 헌신한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이다. 지은 책으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으며, <인사이트코리아>에 ‘김석동이 쓰는 한민족 경제 DNA’를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