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이 허락하는 무한한 변주, 자루소바에서 니신소바까지

6월이다. 만물이 뻗치는 기운을 주체 못해 사방으로 피어나고 자라는 계절이다.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온종일 밀린 일을 처리하는 이에게도 달력은 똑같이 넘어가지만, 이 계절이 주는 혜택은 공평하지 않다. 제법 따가워진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멋진 날씨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녹음과 파도가 부르는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중간고사가 돌아오듯 상반기 결산의 시기가 돌아온 6월의 직장인에게 허용된 계절의 선물은 단골 식당이 개시한 계절 메뉴 정도다.
이럴 때는 회사 앞 식당 문에 나붙은 계절 메뉴 안내도 엔터테인먼트요, 위안이 된다. 그리고 이토록 유혹적인 날씨에도 일터에 붙잡혀 있는 이들에게 6월의 메뉴로 환영 받는 존재는 단연코 ‘소바’다. 메밀국수, 모밀국수, 소바 셋 중 무어라 불러도 좋다. 소바는 모든 것을 처음으로 리셋하는 마법을 부린다.
내 기억에 처음 등장하는 소바는 아버지의 단골이었던 광화문의 노포, 미진에서 만난 메밀국수다. 네모난 칠기 그릇 위 대나무 발에 얹힌 사리와 따로 담겨 나온 쯔유를 낯설어 하는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는 메밀국수 한 젓갈을 양껏 집어 쯔유에 넘치도록 담가 먹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미슐랭 맛집이자 수요미식회 맛집으로 유명한 광화문 미진은 늘 대기줄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광화문 미진의 시그니처 메뉴인 냉메밀, 김가루, 무즙, 파를 취향에 맞게 양을 조절해서 넣을 수 있다.
당시에는 그저 메밀국수라 이름하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면+쯔유의 가장 단순한 구성인 자루소바의 일종이었다. 아마도 80년대 말, 소바를 처음 맛본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간장 맛 진한 한국식 쯔유와 자가제면한 메밀국수로 지금까지도 성업 중인 그 가게가 내 오랜 소바 기행의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이후 나는 대학에 갔고, 졸업했고, 광화문 그 가게 맞은 편에 있던 회사에 취업했다. 그리고 강산이 두세 번은 뒤집힐 세월 동안 이런저런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초여름을 알리는 전령처럼 식당 문 앞에 나붙은 ‘메밀국수 개시’ 라는 전단지를 볼 때면 어김없이 첫 소바의 기억을 떠올렸다.
두 번째 소바는 부산에서 만난 주와리 소바다. 때는 바야흐로 2012년, 경력의 정점을 찍을만한 승진을 하고 딱 일주일 만에 회사에 사표를 냈다. 쉴 틈 없이 달려온 15년의 직장생활과 15년의 결혼생활 사이에서 외줄타기 하듯 버티다 얻은 번아웃 탓이었다. 마침 부산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어린 두 아들을 이고 끼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그 먼 곳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그렇게 이사 간 아파트에서 육교를 건너 골목길에 들어서는 초입에 신장개업한 가게가 주와리 소바였다.
큰 길가도 아니고, 낡은 단독주택단지에 오래된 아파트 몇 동이 고작인 동네 골목에 가게를 연 주인장은 일본의 소바 장인을 불러다 꾸준히 교육을 받는다더니 기어이 그 어렵다는 100% 순메밀 주와리 소바를 내는 데 성공했다. 자부심 가득하던 주인장이 직접 서빙한 소바를 처음 맛본 날을 기억한다.
다소 거친 식감의 면발이 툭툭 끊어졌고 쯔유가 조금 짠 듯도 했지만, 힘있고 강렬한 면발에 진한 쯔유는 무척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우리 네 가족은 그날로 주와리 소바의 1호 팬이 되었다. 두 아들에게는 이 까다로운 100% 순메밀 소바가 인생 첫 소바의 기억일 것이다. 2년 후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우리 가족에게 가장 아쉬웠던 점들을 꼽으라면 더 이상 주와리 소바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100% 순메밀 ‘주와리 소바’를 상호명으로 올린 부산 수영구 ‘주와리 소바’


세 번째 만난 소바는 외양부터 심상치 않았다. 따끈한 국물에 담긴 소바 위에 떡하니 생선조림을, 그것도 등 푸른 생선을 올리는 것은 대체 무슨 취향인가. 처음 간 일본 출장길에서 만난 가장 충격적인 비주얼의 메뉴가 바로 청어 조림을 얹은 따끈한 국물의 소바, 니신소바다.
그때 까지만 해도 소바 전문점을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고, 내가 알아 온 모든 소바는 메밀의 함량과 쯔유의 배합이 조금 달라졌으면 모를까, 메밀면을 쯔유에 담가 먹는 자루 소바나 따끈한 국물에 소바를 넣어 먹는 온소바의 일차적인 구성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니신소바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지독한 장난처럼 느껴지는 그 조합이 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위한 구휼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비교적 싼 생선인 청어를 말렸다가 다시 불려서 간장에 조린 후, 다시마와 톳을 넣어 우려낸 따뜻한 육수를 부은 소바 위에 얹어 먹는다. 담백하고 깔끔한 메밀면과 함께 먹기엔 너무 비리지 않을까 싶었던 청어지만, 한번 말렸다 조려낸 것이라 그런지 비린내 없이 약간은 퍼석한 식감과 함께 간장 베이스의 국물에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조미된 청어를 올려 독특한 풍미로 소바 매니아들을 사로잡는 ‘니신소바’
이제 니신소바를 교토 출장길에서 접한 지 근 십 년이 되어간다. 강산이 한 번 더 변해서 K-pop의 성지이자 전 세계인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도시가 된 서울에는 미쉐린 가이드에 오를 만큼 본격적인 소바 전문점들이 성업 중이다.
청어를 얹은 니신소바 뿐 아니라, 오리고기와 듬뿍 얹은 파채에 진한 국물 맛이 일품인 가모난반, 일본식 청국장인 낫토를 잔뜩 얹어 비벼 먹는 낫토소바, 무를 갈아 얹는 오로시소바, 갈아놓은 마에 달걀노른자를 얹은 도로로소바, 튀김을 곁들여 먹는 덴부라소바까지 일본의 본격적인 소바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메밀 산지인 제주에 가면, 냉소바에 얇게 썬 청귤을 수북이 얹어 산뜻한 맛이 일품인 청귤소바나, 니신소바를 한국식으로 개조한 고등어소바도 만날 수 있다. 과거 여름을 알리는 전령 같았던 메밀국수, 소바의 이미지 또한 사시사철 성업 중인 소바 전문점들의 등장과 함께 변해가는 중이다. 어쨌거나 일본의 대표적인 면식인 소바를 계절에 상관없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갈 수 있는 동네에서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반갑고, 편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산뜻한 맛이 일품인 청귤소바

독특한 풍미로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청어소바 (니신소바)
사실 소바는 여름이 아닌 겨울이 제철인 음식이라고 한다. 메밀로 만든 음식이 그렇다. 원래 6월은 메밀을 심는 계절이다. 90여 일 만에 수확이 가능하다. 그러니 메밀이 진짜 맛있는 시기는 갓 수확한 메밀이 등장하는 12월이다. 그래서 12월이면 각 수확한 메밀의 신선한 향이 살아있는 소바를 즐기러 일본 각지에서 메밀축제를 연다고 한다. 아직 가보지 못한 메밀 축제에는 또 얼마나 다양하게 맛있는 소바가 등장할지, 생각만 해도 설렌다.
그럼에도 내게 소바는 6월의 음식이다. 아직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기 전, 부쩍 더워진 날씨에 외출도 귀찮아진 주말 점심에는 소바가 제격이다. 이제는 시중에도 소바를 해 먹을 수 있는 키트가 다양하게 나와 있고, 건면과 생면, 쯔유, 또는 국수장국을 모두 따로 살수도 있다. 100% 순메밀면 주와리 소바로 입맛을 튼 아이들이지만 엄마가 소쿠리 가득 삶아내는 소바면을 시중에서 산 쯔유에 곁들여 양껏 먹는 것도 좋아한다. 쯔유를 희석해 얼음 잔뜩, 레몬을 얇게 썰어 넣고 차가운 냉소바를 만들어도, 냉장고를 뒤져 나온 청양고추를 와사비 대신 썰어 넣어도, 무국을 끓이다 남은 조각 무를 수북이 갈아 얹어도, 낫토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낫토에 들기름과 김 가루를 얹어 비벼 먹는 낫토 들기름 소바를 만들어 보아도 그 나름대로 맛있다. 내 마음대로, 냉장고 사정대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그 어떤 재료를 얹어도 본질을 해치지 않는 유연함. 가장 단순한 조합, 메밀면에 쯔유라는 설정이기에 가능한 무한한 변주. 그러니 소바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맛이다. 단순함이 허락한, 가장 풍요로운 변주다.

글 강종희 작가
숙명여대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 언론대학원 매스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 취득.
뉴스위크 한국판 공채 1기 기자 /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 근무 / 글로벌 제약기업인 아스트라제네카에서 10여 년간 브랜드 PR, 기업 PR, 위기관리 및 사회공헌활동을 총괄 등 역임했고 현재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저서 『어이없게도 국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