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도 소바, 메밀국수도 소바
일본 고유의 면요리라 할 수 있는 소바는 곡물인 메밀, 또는 음식인 메밀국수를 뜻하는 일본어이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곡물인 소바는 삼각형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게 생긴 열매인데 이 열매의 생김새에서 ‘뾰족한 것, 귀퉁이, 모서리’라는 의미의 일본어 소바를 그대로 열매 명칭으로 사용했다. 예전에는 밀인 고무기와 구별해서 메밀열매를 소바무기라고 불렀으며(무기는 원래 보리를 뜻하는 말), 무로마치시대부터 소바로 줄여 부르기 시작했다. 메밀국수 또한 예전에는 소바키리라고 불렀으며 에도시대 말기부터 소바로 줄여 부르기 시작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에 와서는 곡물인 메밀도 요리인 메밀국수도 모두 소바로 불리게 되었다.
메밀의 원산지
메밀의 원산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일본의 조몬시대(時代, 기원전 8000-300) 후반에 중국의 삼강지역(윈난성, 쓰촨성, 동티베트 경계 영역)에서 한반도를 거쳐 대마도를 중계점으로 규슈 지역에 들어와, 일본 열도로 북상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또 다른 설은 메밀이 중국 북부, 시베리아, 연해주, 홋카이도를 통해 들어와 일본 열도로 남하했다고 추정한다. 일본에서 메밀에 관한 기록은 《고사기(古記)》 (712)나 《일본서기(日本書)》 (720)에도 등장한다.
거친 땅에서도 잘 자랄 뿐더러 생육 기간이 짧은 메밀은 예로부터 배고픔을 달래주는 귀중한 구황작물이었다. 일본인은 국수 형태로 먹기 전부터 여러 형태로 메밀을 먹었다. 죽으로 쒀 먹기도 했고 (소바카유そば粥), 잡곡 형태로 쌀과 섞어 밥을 지어 먹는가 하면(소바고메そば米) 물로 반죽한 메밀가루를 동글게 빚어 익혀 먹었다(소바가키そば掻き) 메밀 반죽에 채소절임이나 팥을 넣어 떡으로 빚어 먹기도 했다(소바꼬치そば餅). 하지만 식감이 거칠고 반죽하기도 힘든 메밀은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었으며, 야마나시(山梨)현이나 나가노(長野)현처럼 쌀과 밀을 재배하기 힘든 산간 지역의 음식이었다.
삼각형 모양이 끝이 뾰족한 열매, 메밀
소바가 ‘면’이 되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9~10세기 문헌에 처음 나타나지만, 메밀로 만든 국수가 등장한 것은 이보다 상당히 늦은 15~16세기다. 앞서 말했듯 메밀국수는 원래 ‘소바키리’라고 불렀다. 소바키리의 발상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슈(信州)설이다. 1645년 간행된 서적 <모취초(毛吹草)>를 보면, 신농국(시나노노쿠니)의 명물로 소비키리가 언급된다. 신농국은 오늘날 신슈 지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다른 하나는 고슈(甲州)설이다. 고슈는 나가노현과 도쿄도 사이에 자리한 야마노시현의 북동부에 있는 도시다. 일본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인 아마노 사다카게가 1704년경에 쓴 <잡록>에 “소바키리는 고슈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오사카 발상설이나 교토 발상설도 있다. 어쨌든 소비키리가 에도(옛 도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시작된 것만은 확실하다.
국수 형태의 소바, 즉 소바키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정승사문서》에 나온다. 《정승사문서》는 나가노현 기소군의 고찰 조쇼지에 전해지는 문서로, 그 내용을 보면 1574년 불전의 수리공사 후 준공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긴에이(金永)이라는 사람이 소바키리를 대접했다.”라고 쓰여 있다. 메밀을 소바가키 형태로 먹던 당시에, 소바키리가 결혼식이나 섣달 그믐 같은 축일에 먹는 특별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초 다가신사의 승려가 쓴 《자성일기》에도 소바키리가 등장한다. “1614년 2월 3일에 소바를 먹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소바키리가 쇼진(精進)요리, 즉 사찰음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승려들이 즐겨 먹던 소바가 점차 일반인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일본 사찰 앞에 소바집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곳 소바는 ‘몬젠소바’라고 불리면서 참배객의 음식으로 정착했다.
사찰의 유명한 메밀국수를 재현하는 소바축제의 한 장면
에도의 패스트푸드, 소바
일본에서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9-10세기 문헌에 처음 나타나지만, 메밀로 만든 국수인 소바(蕎麦/そば)가 등장한 것은 이보다 상당히 늦은 15-16세기다. 이후 소바 문화가 발달한 것은 에도(江戶)시대였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에도 막부를 세워 초대 쇼군(將軍)(막부 수장)이 된다. 이때부터 에도(오늘날의 도쿄)는 무가(武家)를 중심으로 한 도시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1800년대 초반에는 에도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 100만 명에 이르러 세계 최고의 인구 과밀 도시가 된다. 늘어난 인구에 따라 소바의 수요도 증가했다. 에도 초기의 소바는 메밀가루에 아무것도 섞지 않은 100퍼센트 메밀면으로, 이런 반죽은 끈기가 없어 물에 삶으며 풀어져 버렸기 때문에 주로 쪄서 먹었다. 밀가루를 섞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인데, 일설에 따르면 조선인 승려가 메밀 반죽에 밀가루 섞는 기술을 일본에 전해주었다고 한다. 어찌 됐던 이제 밀가루가 섞여 끈기가 생긴 메밀 반죽을 밀대로 밀어 칼로 가늘게 썰 수 있게 됐는데, 이를 ‘자른 소바’라는 의미로 ‘소바키리(蕎麦切り)’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먹는 방식도 바뀌었다. 원래 소바키리는 소멘(素麺)처럼 ‘모리’라는 작은 그릇에 담긴 장국(쯔유)에 찍어 먹는 면이었는데, 에도시대에 야타이(포장마차)가 유행하면서 면에 국물을 끼얹어 먹는 방식이 유행했다. 야타이 소바 장수들은 면을 미리 삶아 놓았다가 손님이 오면 끓는 물에 데쳐 물기를 뺀 후 국물에 부어 내주었다. 이렇게 국물을 끼얹어 파는 소바를 ‘가케소바’(‘가케’는 ‘끼얹다’라는 뜻)라고 불렀다. 가케소바는 재료를 준비하기도 편하고, 간단하게 먹기도 좋고, 값도 저렴했기 때문에 에도시대의 패스트푸드이자 서민 음식으로 정착했다.
에도시대 소바가게의 모습
소바 르네상스
이처럼 에도의 ‘이키’(‘에돗코’라고 불리는 에도내기 특유의 미의식을 뜻하는 말)문화와 결부되면서 널리 퍼져 나가던 소바 문화는 메이지유신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문명 개화’ 풍조속에서 소바가 옛 것 중 하나로 경시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은 1888년 시판된 기계식 제면기였다. 모든 소바집에서 기계로 소바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기계로 반죽하려면 밀가루를 다량 넣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밀가루 대 메밀가루 비율이 3:7이면 고급 소바, 5:5면 보통 소바로 여겨지는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식량난이 벌어지자 대용식으로 취급됐던 소바는 그 맛이나 문화를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연히 손으로 반죽한 ‘데우치’나 메밀가루만으로 만든 ‘기코우치’ 같은 말도 사라졌다.
데우치 소바가 부활한 것은 전후 일본사회 부흥이 한창이었던 1970년대 들어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력난이었다. 당시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기에 진입하면서 소바집에서 장인을 구하려 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소바 업계가 소바를 고급화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데우치 소바를 되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밀가루와 메밀가루 비율이 2:8인 ‘니하치소바’에 불과했지만 종래의 소바에 비하면 맛이 뛰어났다. 이렇게 부활한 데우치 소바는 ‘소바의 뉴웨이브(new wave)’ 또는 ‘소바 르네상스’로 불리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글 이기중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서울대 인류학과 겸임교수
새롭고 색다른 음식을 찾아 세계를 누비는 ‘푸드헌터(Food Hunter)’이자 식도락가다. 수년간 ‘한국의 맛 연구회’와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서울 반가음식과 궁중음식을 전수받았으며, 맥주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닌 맥주통(通)이기도 하다. 그동안 140여개 나라를 여행했고, 여행과 음식에 관한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치는 ‘지적 보헤미안’이다.
여행 작가로서 <동유럽에서 보헤미안을 만나다>, <북유럽 백야 여행>, <남아공 무지개 나라를 가다>를 냈고, 술과 음식에 관한 책 <유럽 맥주 견문록>, <맥주 수첩>, <크래프트 비어 펍 크롤>, <일본, 국수에 탐닉하다>, <위스키 로드>, <위스키에 대해 꼭 알고 싶은 것들>, <밥 먹으로 일본 여행>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