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이냐, 짬뽕이냐.’ 이보다 힘든 결정이 또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했던 고민도 이보다 어렵지는 않았을 듯싶다. 짜장과 짬뽕, 둘 다 거부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마성(魔性)적 매력을 지닌 음식이기 때문이다. 짜장은 달고 고소하고 걸쭉한 ‘검은 마성’을 지녔고, 짬뽕은 맵고 기름진 불향이 흠씬한 ‘붉은 마성’을 품고있다. ‘웃기는 짬뽕’ 같은 아이러니는 한국에서 대표적 중국음식으로 사랑 받는 짜장과 짬뽕이 정작 중국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짜장과 짬뽕은 어디서 탄생할걸까?
한국 ‘짜장면’으로 변신한 중국 산둥 ‘자장몐’
현재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짜장면의 원형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면요리인 자장몐(炸醬麵)이다. 산둥성 아무 식당에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메뉴다. 우리 돈으로 1000원 정도인 값싼 대중음식이다.
이 자장몐을 먹어보면 짜장면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르다. 중국 된장인 몐장(麵醬)을 기름에 볶아 오이 등 간단한 채소와 함께 면에 올려준다. 검은 짜장이 국수가 보이지 않도록 뒤덮여 나오는 짜장면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맛도 짠맛이 강하고 뻑뻑해서 한국인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자장몐이 산둥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건 구한말이다. 1882년 조정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가 변란을 일으킨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청나라는 조선을 돕는다며 군대를 파견했다. 군인들을 따라 상인들이 들어와 인천에 정착했다. 중국땅에서 인천과 제일 가까운 산둥 출신이 가장 많았다. 이들과 함께 자장면이 들어와 팔리기 시작했다.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광복을 맞을 때까지는 자장몐을 중국집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하고 한국과 국교가 단절되자 중식 재료를 본토에서 가져오기가 불가능해졌다. 화교들은 한국에서 자장몐의 주재료인 몐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이들이 담근 몐장은 춘장(春裝)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산둥 사람들은 몐장을 생 대파에 찍어 먹는다. 대파는 한자로 총(蔥)이고, 그래서 산둥 사람들은 몐장을 총장(蔥醬)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게 춘장으로 변형되며 굳어졌다는 설에 대부분의 음식학자들은 동의한다.
화교들이 한국에서 만든 춘장은 산둥의 몐장과 비슷했다. 짠맛이 강했다. 그런데 1948년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인천 영화식품에서 캐러멜을 춘장에 섞은 것이다. 캐러멜이 더해진 춘장은 단맛이 돌면서 훨씬 부드러워졌다. 한국인 입에 훨씬 잘 맞았다. 여기에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 입맛에 맞추고 배달을 위해 보온력을 좋게 하기 위해 물전분(물에 푼 전분가루)를 넣으면서 짜장 소스가 걸쭉해졌다. 영화식품에서 생산한 ‘사자표 춘장’를 사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짜장면 맛이 완성됐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공화춘(共和春)’은 짜장면의 발상지이자 가장 오래된 중국집으로 알려졌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1907년 화교 우희광이 식당 겸 숙박시설 ‘산동회관’을 열었다. 1911년 중국 청조(淸朝)가 망하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우희광은 가게 이름을 ‘공화국의 봄’이란 뜻의 공화춘으로 바꿨고, 191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영업하다가 1983년 문 닫는다. 현재의 공화춘은 과거 공화춘과 아무 연관이 없다.
과거 혹은 ‘원조’ 공화춘의 맛을 비슷하게나마 느껴보려면 ‘신승반점’에 가야 한다. 우희광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중식당으로, 과거 인천 짜장면의 맛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차이나타운에서 지금 영업 중인 중식당 중 가장 오래된 곳은 1957년 개업한 ‘풍미’로, 여기서도 괜찮은 짜장면을 맛볼 수 있다. 요즘 짜장면은 배달하는 동안 식지 않도록 물전분을 풀어넣었으니, 과거 짜장면을 맛을 제대로 알려면 간짜장을 주문해야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건너와 완성된 중식, 짬뽕
짬뽕은 중국음식이지만 고향은 중국이 아니다. 중식 전문가인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는 “짬뽕은 중국어로 차우마미엔(炒碼麵)이라고 쓸 수는 있지만, 실제 중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음식”이라고 말했다.
짬뽕이 태어난 건 일본 규수 항구도시 나가사키(長崎)이다. 지금도 나가사키에 가면 ‘시카이로(四海樓)’라는 중국집이 있다. 19세기 말 시카이로 주인이었던 진평순(陳平順)이 ‘짬뽕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화교가 많이 살았다. 특히 가난한 중국 유학생이 많았다. 유학생들이 값싸고 푸짐하게 먹을 음식이 없을까 고민하던 진평순은 다른 요리를 만들고 남은 해산물, 채소 따위 자투리 재료를 웍(중국식 프라이팬)에 쓸어넣고 볶았다. 쓸모없는 닭뼈와 돼지 잡뼈 등을 우린 육수를 더하고 국수를 말았다. 짬뽕의 탄생이었다.
나가사키 짬뽕은 하얗고 뽀얗다.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맵지 않고 시원하다. 새빨갛게 매운 짬뽕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 신계숙 교수는 “각국 화교들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짬뽕이 한국으로 전해졌다”며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짬뽕은 하얗고 맵지 않은 음식이었다”고 증언했다. 신라호텔 후덕죽 조리담당 상무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맵게 먹기 시작한 것이 일반 짬뽕 메뉴로 정착했다”며 “매운 짬뽕은 한국이 원조”라고 말했다.
짬뽕이라는 이름은 ‘밥 먹었냐’는 중국말 ‘츠판(吃飯)’이 일본에서 ‘찬폰(ちゃんぽん)’으로 변하고, 한국으로 전해지며 ‘짬뽕’으로 굳었다는 게 통설이다. 짬뽕을 비속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지만, ‘뒤섞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엄연한 표준어다.
짜장면은 그 탄생 장소와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인천 개항기라고 두루뭉술하게라도 알려졌지만, 짬뽕은 그나마도 없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 한국으로 넘어왔고, 어느 가게나 지역에서 처음 판매됐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근본 없는 음식’이라고 비하할 수도 있지만, 덕분에 오히려 한국 모든 지역과 도시마다 독특한 맛과 개성을 자랑하는 짬뽕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서울 분점을 낼 정도로 성업 중인 평택 ‘영빈루’는 돼지고기가 들어가 묵직하고 진한 맛을 내는 짬뽕이 유명하고, 부산 ‘복성반점’은 한치 새우 조갯살이 듬뿍 들어간 얼큰한 짬뽕을 3대째 40년간 내고 있으며, 대구 ‘짬뽕집’은 커다란 문어 다리가 들어가는 문어짬뽕이 독특하며, 광주 ‘신락원’은 삼선짬뽕보다 홍합이 들어간 일반 짬뽕이 더 낫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전 ‘동해원’은 돼지뼈를 48시간 고아 만든 육수에 돼지고기와 오징어와 각종 채소를 더해 영혼을 울리는 깊은 맛을 낸다. 속초 ‘금성각’, 동해 ‘덕취원’, 고성 ‘수성반점’, 전남 고흥 ‘일성식당’과 전남 완도 ‘태화각’은 조개 홍합 새우 등 해산물이 산더미 같이 쌓여 나오는 짬뽕이 압권이다.
전북 군산과 충남 공주는 도시 규모에 비해 짬뽕집이 많고 맛있다는 의외의 공통점이 있다. 돼지고기를 고명으로 올린 꼬막짬뽕으로 유명한 ‘복성루’는 군산에서 가장 유명한 짬뽕집으로 아침에 문 열자마자 길게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을 볼 수 있다. 복성루와 함께 군산 2대 짬뽕집으로 꼽히는 ‘쌍용반점’은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짬뽕을 낸다. “복성루나 쌍용반점보다 ‘빈해원’ 짬뽕이 낫다”는 군산 시민도 많다. 충남 공주에서는 ‘동해원’ ‘장순루’ ‘진흥각’ ‘청운식당’이 3대 짬뽕집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툰다.
프리미엄 라면으로…세력 확장해가는 짜장면과 짬뽕
짜장면과 짬뽕은 대표적인 배달음식이다. 중국집에서 사 먹기도 하지만 집으로 배달시켜 먹는 경우가 훨씬 많다. 산둥의 자장몐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 물전분이 한국의 짜장면에 많이 들어가는 것도 배달 때문이었다는 게 중국집을 운영하는 많은 화교들의 말이다. 물전분을 짜장 소스에 섞어주면 쉬 식지 않을뿐더러, 시간이 좀 지나더라도 음식 맛과 형태를 어느 정도는 유지하기 때문이다. 대신 면의 호화를 촉진시켜서 탱탱한 탄력을 잃고 죽처럼 물컹하달까 흐물흐물한 식감을 내는데가 느끼한 맛이 강해진다는 단점은 있다.
최근 들어 짜장면과 짬뽕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경우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일반 라면보다 비싼 1000원대 프리미엄 라면이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마트에서 지난 2월 전체 라면 매출 중 프리미엄 라면 비중이 61%로 지난해 같은 기간 22%와 비교하면 3배 가까이 늘었다.
프리미엄 라면 시장을 주도하는 것이 짜장면과 짬뽕이다. 소비자에게 기존 라면보다 비싼 프리미엄 라면 가격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기존 라면과는 다른 맛을 내놔야 하는데, 짜장면과 짬뽕이 거기에 가장 적합했다는 판단이다. 맛없는 배달 짜장면이나 짬뽕을 먹느니 라면이라도 제대로 끓이면 훨씬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점도 주효했다고 보인다.
최근엔 프리미엄 라면과 비슷한 가격에 생면과 소스를 사용해 맛도 더 좋은 냉장면 제품도 인기가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짜장면과 짬뽕이 그 검고 붉은 마성의 세력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고 있는 듯하다.
글 조선일보 김성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