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山門)에서는 국수를 ‘승소(僧笑)’라고 부른다. 스님(僧)을 미소(微笑)짓게 한다는 뜻이다. 사찰에서 ‘스님, 죽 끓여드릴까요?’ 물으면 아무도 대답 않지만, ‘스님, 국수 삶아 드릴까요?’ 라고 하면 모두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고 한다. 이처럼 국수는 스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승소라는 말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면식문화는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고려시대 ‘조면사(造麵寺)’란 절에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국내 최초 국수 관련 기록이다. 조면사는 강원도 춘천에 있었다. 절은 사라졌지만 절터에 남은 ‘조면사지탑’은 고려사 기록을 입증하고 있다. 국수는 스님뿐 아니라 한반도 사람 누구나 미소 짓게 한 음식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거 국수는 엄청나게 귀하고 비싼 음식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트러플(송로버섯)이나 캐비아, 푸아그라에 버금가는 최고급 럭셔리 식재료였다. 여름이 덥고 습한 한국에서는 평안도·황해도·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밀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조선 말까지도 밀가루는 진말(眞末)이라 하여 귀하게 여겼고,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극소수만 먹을 수 있었다. 밀가루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생산한 밀을 일본으로 들여가는 과정에서 조선 서민도 맛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리고 6·25전쟁 이후 미국이 무상 원조를 시작하면서부터 떡볶이, 칼국수, 가락국수 등 밀가루로 만든 분식(粉食)은 길거리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는 흔하고 값싼 음식이 됐다.
국수 먹는 날
결혼 적령기 남녀에게 “국수는 언제 먹여 줄 거야?”라는 말은 결혼을 채근하는 일가친척의 인사였다. 평소 쉽게 먹지 못하는 귀한 밀가루로 만드는 국수가 잔칫날이나 혼례에 접대하는 식사가 되다 보니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국수란 잔치의 음식이자 장수의 음식이다. 잔치국수는 말 그대로 ‘잔치 때 먹는 음식’의 대명사였다. 면이 길게 이어진 모양은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긴 수명을 살기 바란다는 뜻과 마음을 대변했다 혼례로 부부의 연을 맺는 날엔 길연(結緣)이 길게 유지되란 기원을 담았다. 국수 가닥처럼 오래오래 잘 살기를 당사자와 손님 모두에게 축복을 비는 음식의 문화였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음식
세종 4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국왕 세종이 어전회의에서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에 관한 내용이 있다. 태종이 승하한 후 7일째에 예조에서 세종에게 고한다. “태상왕의 수륙재(水陸齋)에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 면,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하소서”라고 고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진전’은 태종의 제단이다. 면은 국수, 병은 떡이다. 만두, 국수, 떡 등은 귀한 음식이었다. 제단, 불상, 승려들에게만 국수를 내고 고급 관리들에게는 국수를 내지 말자고 정했다는 내용이다. 고려 왕실에서는 종묘에 제사 드릴 때 소 대신 국수로 제사를 지냈다. 이를 ‘면생(麵牲)’이라 했다. 제물로 바치는 가장 귀한 공물이던 소, 돼지, 양을 ‘희생(犧牲)’이라 한다. 이 희생을 대신한 국수라는 의미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였기에 국가의례에서도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 가르침을 실천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왕실 제례에 두부로 만든 탕과 요리를 국수와 함께 올렸는데, 이는 고려 제도가 조선시대로 이어진 것이다.
경북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4:1 비율로 반죽해 가늘게 칼로 썰어 낸다. 썰어 낸 면을 다시 콩가루에 묻혀서 끓는 물에 삶는다. 삶아 낸 면을 건진 다음 찬물에 행궈 한 사리씩 소쿠리에 담아 놓는다. 이 한번 삶아 건지는 과정 때문에 “건진국수” 라는 이름이 붙었다. 종가에서는 밥보다 몇 등급 위의 음식으로 쳤던 국수를 제사에 올렸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4가지 큰 행사 즉 성인식, 혼례, 초상, 제사를 관혼상제(冠婚喪祭)라고 한다. 이들 중요한 날에는 특별한 음식을 내놓는다. 그런데 결혼식과 제사에는 국수가 올라가지만, 상가(喪家)에서는 국수를 내지 않는다. 결혼을 치르는 날과 제사날은 미리 예측할 수 있어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있지만, 초상은 미리 예측할 수 없다. 국수는 밀을 미리 준비해 빻고 치대고 썰 시간이 필요한 음식이라 결혼과 제사에는 낼 수 있지만, 초상에선 낼 수 없었다는 게 현실적 이유다. 생명과 인연이 길게 이어지라는 기쁘고 긍정적 바람을 품은 국수를 초상집에서 낼 수 없다는 상징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밀가루를 반죽해 뽑은 면은 과거 왕도 자주 먹을 수 없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가늘고 긴 면발을 호로록 면치기 할 수 있는 행복을 매일 어디서도 누릴 수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음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글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전문 기자
2000년 조선일보 입사 후, 기자 경력 대부분에 음식 분야를 취재해왔다. 세계슬로푸드협회가 설립한 이탈리아 미식학대학(UNISG)에서 ‘이탈리아 지역별 파스타 비교 분석’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커피 이야기’, ‘식도락계 슈퍼스타 32’, ‘세계인의 밥’, ‘이탈리아 여행 스크랩북’, ‘음식의 가치’(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