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면의 과학

기다란 면의 과학
‘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기다란 외형일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면을, 밀가루 따위로 반죽을 만들고 이를 손이나 기계로 ‘가늘고 길게’ 뽑아낸 식품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반죽을 가늘고 길게 뽑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문화권에서 기다란 면은 장수와 번영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기다란 면에는 이러한 상징성 외에도 ‘과학적인’ 여러 특징들 또한 발견된다.
가늘고 길면 좋은 이유
자연에서도 가늘고 길게 뽑아지는 것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누에고치가 있는데, 나방의 일종인 누에는 입을 통해 가늘고 기다란 물질들을 배출해 스스로를 감싸 고치가 된다. 세포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한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은 현미경을 통해 누에고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찰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응용하면 인간이 섬유를 생산할 수도 있을 것이라 주장했는데, 오늘날 합성섬유의 출현을 예견한 것이다.
섬유를 가늘고 기다랗게 뽑는 이유는 우수한 물성(物性)때문이다. 섬유를 분자단위로 들여다보면 작은 분자들이 수백개 이상 결합된 기다란 고분자 사슬(polymer chain)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누에고치의 경우에는 피브로인이라는 단백질 고분자들이 주성분이고, 합성섬유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합성 고분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고분자 사슬들이 물리적 힘이나 기타 요인들에 의해 무질서한 상태(isotropy)에서 특정한 방향성이 있는 상태(anisotropy)로 정렬되면서 우수한 물성을 나타낸다.
면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특징을 갖는데, 우리가 흔히 ‘식감’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곡물가루를 반죽하면 탄력성이 나타난다. 이는 곡물의 주성분인 단백질, 탄수화물 등의 고분자 사슬들이 서로 엉키고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를 길게 뽑으면 그 식감이 더 강조되는데, 앞서 섬유의 경우처럼 고분자들이 방향성을 갖고 치밀하게 정렬되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연신(延伸)을 통해 만들어지는 납면(拉麵)은 이러한 원리를 이용한다. 물론 반죽만으로도 충분한 탄력성을 얻을 수 있다면 별도의 뽑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밀가루 반죽을 칼로 썰어 만드는 절면(切麵)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밀가루의 글루테닌과 글리아딘 단백질들이 서로 결합해 만들어지는 글루텐이 매우 강한 탄력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길다고 끝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면 사랑은 보다 더 다양한 방식의 제조법들도 탄생시켰다. 반복적인 연신의 번거로움을 대신할 압출(壓出)공정도 그 중 하나인데, 반죽을 강한 힘으로 좁은 구멍을 통해 밀어냄으로써 연신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합성섬유는 대부분 이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때 압출과 연신을 병행하면 섬유의 강도는 더 높아진다.
한편, 특징적인 식감을 부여하고자 내부 미세구조를 조금 더 변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충분한 숙성을 통해 면의 수분 유지력을 높이는 다가수(多加水)공법은 더 탱탱한 식감을 살린다. 뜨거운 물로 반죽하여 전분을 활성화시키는 익반죽은 쫄깃한 식감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때로는 첨가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중화면은 반죽 시 소량의 소금을 첨가하는데, 소금의 이온 성분들이 고분자들의 상호작용을 더 활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럽산 밀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중국 밀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개발된 방식이다. 현재는 탄산칼륨(K2CO3) 등이 주성분인 ‘면류첨가 알칼리제’라는 것이 주로 사용되는데, 알칼리 조건에서는 단백질들 간의 화학결합이 활성화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고보니 면은 그 존재부터 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면이 맛있는 과학적 이유
요리를 과학적으로 정의해 본다면 ‘조리 과정을 거쳐 분자 단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원식재료에 없던 새로운 식감과 풍미를 만들어내는 일 또는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변화는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주로 식감을 만들고 후자는 풍미, 즉 향과 맛의 원인이 된다.
몸에 좋으면 맛도 좋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직립보행과 커다란 두뇌이다. 약 200만년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특징들은 또 다른 신체적 변화를 야기했는데, 그것은 바로 소화기관의 축소이다. 뇌가 소비하는 에너지는 11.2W/kg로 몸 전체 평균(1.25W/kg)의 약 10배에 이른다. 이처럼 고에너지 기관인 뇌가 커짐에 따라 소화기관의 부피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전체 에너지의 균형을 맞춘 것인데, 참고로 소화기관의 에너지 소비량은 12.2W/kg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쇄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작아진 소화기관으로 어떻게 거대해진 뇌를 지탱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인간은 요리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 요리는 식재료의 변화를 통해 소화․흡수율을 끌어 올린다. 다시 말해 더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인다. 만약 인간이 요리를 하지 않고 생식만 한다면 하루에 9.3시간은 오롯이 식사에 할애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면은 단단한 곡물을 분쇄하고 이를 물과 반죽하여 수화(水化)된 상태로 만들어진다. 그러면 가열했을 때 내부 수분에 의해 열전달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빠르게 골고루 익는다. 게다가 외형이 가늘고 길기때문에 이러한 효율성은 더욱 커진다. 균일하게 잘 조리된 면은 소화․흡수가 잘 되니 우리 몸에 유익할 수 밖에 없는데, 이처럼 유익한 음식에 우리 뇌는 ‘맛있다’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면 그 자체의 맛있음을 넘어
부드러운 식감과 더불어 요리의 경험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인은 풍미, 즉 향과 맛이다. 그런데 면 그 자체의 풍미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면요리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면의 또 다른 특별한 능력 때문이다.
육안으로는 매끄럽게 보이지만 면의 표면에는 수많은 구멍들이 존재하는데, 반죽과정에서 포집된 수분이 배출되면서 남은 빈 공간들이다. 그리고 이 공간으로 국물이나 소스가 흡착되어 면과 하나가 되면서 다소 부족한 면의 풍미를 보완해 준다.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라면이다. 면을 튀기면 내부의 수분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증발해 훨씬 더 크고 많은 구멍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참고로 수분이 가열되면 그 부피가 1700배 팽창한다. 이처럼 활성화된 다공성 구조는 외부의 맛과 향 성분들을 더 잘 흡착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요리는 주관적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 정보들은 신경통로를 따라 뇌의 ‘시상’이라 불리는 곳에 1차적으로 모여든다. 그런 다음 뇌의 각 부분으로 다시 흩어지는데, 후각은 특이하게도 이 경로 외에도 ‘해마’ 그리고 ‘편도체’라 불리는 곳과도 연결된다. 해마는 장기 기억을, 그리고 편도체는 감정을 느끼는 것과 관련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후각 정보는 오래전 기억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를 ‘프루스트 현상’이라 하는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했다.
면요리가 맛있다고 느껴진다면, 식감과 풍미가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면요리와 연관된 아름다웠던 기억과 감정이 소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글 임두원 연구원 (과학 스토리텔러)
現 국립과천과학원 연구원
서울대학교에서 고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기업에서 연구 개발 부문에 종사하다가 정부 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과학기술 정책 기획을 담당했다. 현재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연구관으로 근무하며 과학 대중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TVN 유퀴즈에 출연하여 화제에 오른 인물
저서 <튀김의 발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읽기> <과학으로 생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