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게 돌돌 말아 놓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늘어 뜨려 놓기도 하는 카놈찐 국수
태국의 아침 풍경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이 국수는 하얀색 비단결 같이 곱디 고우며 촉촉하다. 카놈진이라고도 불리고 카놈찐이라고도 하는데 승려의 서품(敍品)이나 결혼식 피로연처럼 중요한 행사에 만들어 먹은 음식이었다. 국수의 가닥들이 승려들이 축복한 후에 손목에 둘러주는 흰색 끈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신성한 축제 음식으로 여겨졌다. 카놈찐은 주로 아침이나 낮에 먹는데 그 이유는 태국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제례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승려들에게 정오에 음식을 제공하고, 그 이후로 승려들은 금식을 해야 한다. 이러한 관습慣習에 따라 이 국수는 늦은 아침의 습관習慣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1주일 동안 숙성 시키며 만들어야 찐 카놈찐이다
만드는 시간만 해도 1주일 정도 걸리는 면이다 보니 축제나 제사, 혼례와 같은 의식에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일 수 밖에 없었을 것. 그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하다.먼저 소쿠리에 여러 번 깨끗이 씻은 쌀을 담고 물을 부은 뒤 바나나 잎으로 덮고 돌처럼 무거운 것으로 눌러 놓는다. 매일 아침과 저녁, 쌀을 위아래로 섞어주고 물을 붓는데 4일동안 숙성 시키는 것이다. 4일 후 숙성된 쌀을 눌러 담은 후 소금물에 재워 놓고 이틀 동안 또 숙성 시킨다. 이 소금물은 매일 한번씩 갈아준다고 한다. 그렇게 숙성된 쌀을 천에 담고 무거운 것을 올려 하룻밤 동안 물기를 모두 뺀다. 숙성 시간만 해도 1주일이나 되는 쌀 반죽을 동그랗게 빚어 쪄서 익히면 일차 반죽이 완성된다. 그 다음 반죽을 절구에 넣고 찧어서 부드럽고 찰 지게 해준다. 절구에서 찧은 반죽 덩어리에 따뜻한 물을 조금씩 넣어 반죽에 물기가 생기면 천에 담고 쥐어짜듯이 비틀어서 천 사이로 빠지는 고운 반죽만 걸러낸 후, 이 반죽을 면 틀 안에 넣고 90-95도 정도의 뜨거운 물에 짜서 압출하면 면이 된다. 그렇게 면이 익으면서 길고 얇은 하얀색의 카놈찐이 완성되는 것이다. 1주일 간 숙성 시켜 만든 카놈찐은 찰지면서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되는데 다 만들어 진 후에도 생면 발효가 진행된다고 한다.
‘웬로이’라고 불리는 면 틀에 반죽을 넣고 압출해서 뜨거운 물에 짜는 전통방식과 기계로 뽑아내는 현대방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기계로 뽑아 낸 카놈찐을 채반에 얹어 판매를 준비한다
카놈찐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온 마을의 분업이 필요했던 시절
마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분업을 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었던 귀한 음식은 현대화 과정을 거쳐 기계를 통해 놀랍도록 단순한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가지런하게 돌돌 말려진 채 우리를 기다리는 뽀얀 살결의 카놈찐은 하루 종일 먹을 수도 늦은 밤에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태국 노점은 아침이나 새벽에 문을 열고 오후에는 문을 닫는다.
카놈찐 국수는 상온상태로 먹는 게 일반적이다. 소스는 살짝 미지근하거나 쌀쌀한 날씨에는 조금 더 따뜻하게 데워 먹는다. 손님이 소스를 선택하면, 그 소스를 면 타래 위에 숟가락으로 두 세 번 끼얹어 손님 앞에 놓는다. 손님 옆에는 갖가지 채소나 허브를 담아놓은 그릇이나 쟁반이 있고 손님들은 기호에 맞게 골라 국수에 곁들여 먹는다. 생 채소. 데친 채소, 절인 채소, 말린 채소가 토핑 재료이다. 베트남 쌀국수는 국물에 목숨 걸고 태국의 쌀국수는 토핑에 열광한다고 했던가. 토핑 재료를 고르다 보면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카놈찐 국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소스는 민물 생선, 말린 고추, 샬롯, 마늘, 레몬그라스, 그라차이 grachai(야생 생강)으로 만든 남야 mahm yaa다. 소스의 형태와 계절에 따라 각 지역마다 선호하는 채소와 허브가 있는데 시장에서 사야 하는 다른 채소와는 달리 근처에서 자라는 현지의 채소들은 직접 따서 사용할 수도 있다. 숙주는 거의 모든 종류의 소스와 항상 잘 어울리며 레몬 바질은 ‘남야’의 모든 종류에 빠짐없이 들어간다. 잘게 채 썰어 놓은 겨자 잎과 삶은 달걀도 가판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아침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카놈찐 국수 노점
보트 위에서 국수를 판매하고 있는 태국의 국수 상인
카놈찐의 의미에 대한 2가지 설
사실 ‘카놈찐’이라는 말은 태국어가 아니다. ‘찐’이라는 말이 중국이라는 뜻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에서 온 음식도 아니라는 설이 있다. 한 가지 설은 ‘카놈’이라는 말이 후식을 뜻하고 ‘찐’이 중국을 뜻해서 합치면 ‘중국후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설은 ‘카놈찐’이 먼(Mon)족의 음식으로 추정되는데, 먼족은 태국이 생기기 전부터 인도차이나반도의 중앙부에 살았고 현재는 태국의 쌍카부리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먼족의 말로 ‘카놈’은 둥글게 반죽한 면을 듯하고, ‘찐’은 익다라는 뜻이다. 먼족의 언어로 해석하면 ‘카놈찐’은 두 번 익힌 면이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태국 사람들은 긴 시간 숙성 시켜 만들어 찰지면서도 오랫 동안 보관이 가능한 카놈찐을 즐겨 먹는다. 반면 2일 정도의 짧은(?)시간에 만든 카놈찐은 오래 보관할 수 없으며 면이 거칠어서 선호도에서 밀려난다.
태국인들에게 카놈찐은 쌀을 숙성 시켜서 만드는 점에서 다른 쌀 면과 구분된다. 일반 국수 식당에서 카놈찐을 팔지 않는 이유라고도 한다. 카놈찐은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북부에서는 ‘카놈쎈’, 동북부에서는 ‘카우뿐’, 남부에서는 ‘라싸’라고도 불린다. 그냥 쌀국수 인 줄 알았더니 발효된 쌀국수인 카놈찐은 상온에 두고 있으면 발효 과정이 이어진다. 태국의 고유한 음식 문화인 카놈찐을 쌀국수의 진짜 묘미라고 생각되어지는 대목이다.
참고 문헌
– “타이 스트리트 푸드” 데이비드 톰슨 (시트롱 마카롱출판)
– “월간 아세안문화원” (한국국제교류재단)
– Travie Magazine
글 박현진
누들플래닛 편집인
IMC 전문 에이전시 ‘더피알’의 PR본부장이자 웹진 <누들플래닛> 편집인을 역임하고 있는 박현진은 레오버넷, 웰컴퍼블리시스, 화이트 커뮤니케이션즈, 코래드 Ogilvy & Mather에서 근무하며 20년 동안 100개 이상의 브랜드를 경험했다. 켈로그, 맥도날드, CJ제일제당, 기린프로즌나마, 하이트진로 등 국내외 다수 식품 기업의 광고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였으며, ㈜한솥에서 브랜드 담당자로 근무한 경력과 F&B 브랜드의 마케팅을 담당한 이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