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냉면이 맛있는 세 가지 이유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겨울철 냉면을 찬양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힌트는 그들의 시와 노래에 등장하는 신선한 고기와 맛이 좋은 겨울 동치미 같은 제철 식재료에 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여름철에 냉면을 찾지만 재료의 맛과 품질만 보면 여름을 냉면의 제철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평양냉면의 주요 재료 3가지만 따져봐도 겨울 냉면 맛의 우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메밀이다. 메밀은 서늘한 기후대에서 자란다. 국산 메밀의 60%이상이 제주도의 산 중턱, 고지대에서 재배된다. 메밀은 생장과 보관에 있어 수분과 온도에 매우 민감한 작물로 알려져 있다. 메밀은 생장 기간이 짧아 이모작을 하는데 봄과 가을에 두 번 파종하고 여름과 초겨울에 수확한다. 물과 열에 약한 메밀은 여름보다 겨울에 수확한 것의 맛과 향 등 품질이 뛰어나다. 따라서 햇메밀로 냉면을 만든다고 가정 했을 때, 겨울 메밀로 만든 면이 맛이 더 좋을 수 밖에 없다. 수확 전에 비를 맞을 경우, 여름 메밀에서는 싹이 트기도 하고 자체 수분 함량이 높아 반죽이 잘되지 않거나 상태가 심할 경우, 반죽이 툭툭 끊어져서 면으로 만들기도 어려울 정도다.
둘째, 한우의 맛이다. 100% 소고기를 사용하는 육수를 기준으로 한우의 품질에 따른 육수의 맛은 겨울철이 월등히 뛰어나다. 평양냉면 육수의 진한 맛은 소고기의 지방과 단백질 성분인 각종 아미노산이 오래 끓이는 조리과정을 통해서 육수에 우러나는 것이다. 모든 동물이 그러하듯 소도 겨울철에 기온이 내려가면 몸에 지방을 축척한다. 겨울 한우가 감칠맛이 뛰어나고 깊은 육수를 만들어 내는 이유다. 평양냉면 매니아들은 단골집의 육수 맛을 대부분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겨울철 육수가 확실히 육향이 뛰어나고 감칠맛이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름철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설레는 마음으로 단골집을 다시 찾아간다.
셋째는 무와 배추의 맛이다. 김장철 두 채소의 맛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속이 꽉 찬 겨울 배추는 아삭하고 고소한 단맛이 나는데 약하게 절여서 냉면 고명으로 올리거나 물이 많은 김치로 담아 냉면과 함께 낸다. 배만큼 단맛이 난다는 월동 무는 무김치로 담아 고명으로 올리거나 동치미로 만들어 육수와 섞어 쓴다. 이렇게 배추와 무는 겨울 냉면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결국 맛으로만 보면 여름 냉면이 제철 겨울 냉면을 이기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겨울철 냉면집 사장님의 속마음은 심히, 복잡할 수 밖에.
냉면집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여름철 냉면집은 호떡집에 불이 난 꼴이고 겨울철은 매출이 절반 가까이 떨어질 만큼 한가하다. 겨울철에 영업이 잘 되지 않아 속도 상하지만 그보다 심란한 건 냉면 맛이 가장 좋은 계절에 제철장사를 못하는 현실 때문에 그 속이 미묘하고 더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겨울철이 되면, 일년 중 냉면 맛이 가장 좋다고 열광하는 단골손님을 보면서 제일 맛있는 냉면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끊임없이 드는 것이다. 냉면집 사장님들이 모두가 찾는 시원한 여름 냉면처럼 사랑받는 겨울 냉면의 계절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겨울 햇메밀
겨울 햇메밀을 반죽하여 바로 뽑아내는 장면 ⓒ 연합뉴스
지구 온난화의 나비효과, 21세기 봄날의 평양냉면 열풍
몇 년 전부터 봄에도 낮 기온이 25도를 훌쩍 넘어가면, 벌써부터 전국 냉면집들은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느 계절이나 대표음식은 있지만, 냉면만큼 한 계절의 스포트라이트를 단독으로 누리는 음식도 없다. 이미 SNS는 전국 유명 냉면집의 평양냉면 인증샷으로 가득 찼고, 각종 미식 모임들은 ‘선주후면’을 즐기려 냉면집을 예약하기 바쁘다. 오랫동안 사랑받던 을지로 노포의 재등장 소식에 미디어는 ‘왕의 귀환’이라며 올봄 평랭 바람몰이를 제대로 했고 고객들은 엄청난 대기줄을 이어가며 화답했다. 올해도 그렇게 냉면의 계절, 여름은 한 걸음 빠르게 시작되었다.
찬샘골의 ‘곡수’에서 1930년대 서울의 ‘냉면 거리’의 ‘최초의 배달 음식’이 되기까지.
우리 나라 근대사 중 가장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여성화가 나혜석(1896∼1948)의 드로잉, 자전거를 타고 한 손으론 냉면 쟁반을 받쳐들고 라이딩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냉면집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여름철 냉면집은 호떡집에 불이 난 꼴이고 겨울철은 매출이 절반 가까이 떨어질 만큼 한가하다. 겨울철에 영업이 잘 되지 않아 속도 상하지만 그보다 심란한 건 냉면 맛이 가장 좋은 계절에 제철장사를 못하는 현실 때문에 그 속이 미묘하고 더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겨울철이 되면, 일년 중 냉면 맛이 가장 좋다고 열광하는 단골손님을 보면서 제일 맛있는 냉면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끊임없이 드는 것이다. 냉면집 사장님들이 모두가 찾는 시원한 여름 냉면처럼 사랑받는 겨울 냉면의 계절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20~3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은 평양냉면은 더이상 겨울에만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겨울철에 흔히 먹던 김치나 동치미 국물은 꿩, 돼지, 소, 닭, 노루 등으로 끓인 각종 고기 육수로 대체되거나 육수와 동치미를 섞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고급화되었다. 전성기 시대의 평양냉면은 메밀 100%로 만든 면을 소고기 육수에 말아먹는 것을 최고로 쳤는데 그때의 형식이 백 년 후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한여름 더운 날씨로 인해 동치미육수, 고기육수, 고기고명 등이 상하는 일은 빈번했다. 미식가가 독어복이 무섭다고 최고의 횟감을 피하지 않듯, 사람들은 더운 여름에도 냉면집 앞에 줄을 섰고 냉면 배달부들은 자전거를 운전하며 한 손으로 냉면 그릇과 주전자를 가득 얹은 모판을 들고 골목을 누볐다.
서울의 냉면거리 사진 ⓒ 한겨레신문
‘이랫거나 저랫거나’ ‘냉면은 겨울에 먹는 것이다’
-김남천의 수필 <냉면>에서-
사계절 내내 냉면을 먹게 된 이후에도 어째서인지 각종 기록과 문헌에는 겨울 냉면에 대한 이야기가 월등히 많다. 대표적인 평양냉면 찬가로 불리는 김소저의 글 <사철 명물; 평양냉면>과 김남천의 수필 <냉면>에는 겨울 냉면 찬양으로 가득하다.
김소저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 ‘국수요~’하며 방문을 열고 들여놓는 타래 지은 냉면을 묘사하며 한겨울 바깥 날씨와 대비되는 펄펄 끓는 온돌방 아랫목에 앉아 몸을 떨며 살얼음 뜬 김치국에 만 냉면 한 그릇을 맛보는 즐거움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1938년 5월 일간지에 실렸던 소설가 김남천의 수필 <냉면>은 대표적인 평양냉면 찬가로 꼽힌다. 술을 좋아했던 그가 멍하게 방안에 있다가 불현듯 냉면 생각에 거리로 나가 친구를 만났는데, 차나 한 잔 마시러 가자는 친구에게 ‘차는 무슨 차, 우리 냉면 먹으러 갑시다.’하고 앞서서 냉면집을 찾았다는 일화도 담았다. ‘냉면은 어느 계절에 먹는 음식일까?’라고 자문하고는 ‘이랫거나 저랫거나 냉면은 겨울에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왠만큼 국수 맛을 아는 사람은 한겨울에 오히려 냉면 맛을 즐겼으며 ‘혀를 울리는 쩌르르한 전동치미 국에 메밀면을 풀어놓고 훅훅 들이켜는 맛이란 다른 계절에선 찾아볼 길이 없는 훌륭한 미각’이라고 극찬했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시인 백석의 <국수>에서도 겨울 냉면 맛에 대한 찬양을 찾을 수 있다. 백석은 겨울 제철 식재료인 꿩고기와 동치밋국으로 만든 냉면을 즐기며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라고 노래했다.
평안남도 성천 출신의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남천(1911~1953)
이 책은 김남천의 소설과 비평 가운데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작품을 모은 《김남천 작품집》이다.
펄럭, ‘냉면 제철을 맞다’, 겨울 냉면 축제를 꿈꾸다.
필자가 평양냉면 브랜드를 홍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3년 전 겨울, 냉면 축제를 기획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모든 냉면집들이 꿈꾸는 겨울 냉면을 알리는 싶은 일에 앞장선 사람들과 만나, ‘냉면의 날’이라는 행사를 주최했다. 평양냉면에 대한 역사와 전통을 대중에게 알리고 진짜 냉면의 제철인 겨울을 즐기는 문화를 만들고자 기획되었다. 행사는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인 동짓날에 시작해서 그 해 겨울, 냉면 매니아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전국 약 40개의 유명 냉면집들이 참여했는데 역사상 최초로 냉면집이 연합해서 겨울 냉면을 함께 홍보한 뜻깊은 일이었다. 내부사정으로 한 해를 진행하고 현재는 멈추어 있지만, 냉면이라는 소중한 유산을 알리고 제대로 즐기고자 하는 냉면인들의 마음이 멈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종종 함께 행사에 참여했던 냉면집 사장님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며 새로운 ‘냉면의 날’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대한민국이 제철 맞은 겨울 냉면을 즐기는 그날을!
제1회 행사의 안내장이다. 1회를 마치고 아직 2회를 열지 못하고 있지만 그 때 참가했던 매장을 보니 그야말로 진짜배기만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면의 날 11월 11일을 정하고 멋진 포스터를 남겨두었다.
길죽길죽 면발을 내리는 장면을 연상케하는 일러스트 위에 이냉치냉이라는 한자가 즐거움을 선사한다
글 성계명
평양냉면전문점 서관면옥 사업 및 브랜드 담당 이사
13년간 YBM Sisa, 잉글리쉬무무, 뮤엠영어 등에서 프로그램 개발자 및 교육전문강사로 근무했다. 각종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바탕으로 시사 팟캐스트 진행자로 활동했고 이후 음악저작권사업 및 선거 캠페인 분야에서 홍보일을 시작했다. 2021년 ‘냉면의 날’을 기획하며 새롭게 F&B 분야에 도전했으며, 현재는 유명 평양냉면전문점의 사업 및 브랜드 담당 이사로 근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