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맛,
그 옛날짜장면은 어디로 갔을까?
어느 피아노 조율사의 짜장면 주유천하
피아노 조율사가 있다. 인천에 사는 조영권이라는 분이다. 전국을 누비며 피아노를 조율하고, 틈틈이 오래된 동네 중국집을 찾아다닌다. 그가 쓴 『중국집』은 출장길에서 만난 노포(老鋪)들 사연으로 가득하다. 피아노와 중식당, 뜻밖의 조합이지만 짭짤하게 잘 어울린다. 그의 책은 내 여행 필수품이다.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군산의 형제반점이 그중 하나다. 오래된 단층 슬라브 건물의 샤시 문을 열고 들어가면 1980년대로 순간 이동하는 기분이 든다. 네 개의 식탁, 손글씨 메뉴판, 큼지막한 숫자의 달력, 세월을 말해주는 괘종시계와 선풍기…. 고슬고슬한 볶음밥 위에는 얇게 부친 계란지단이 곱게 덮여 나온다. 면은 적당히 쫄깃하고 제대로 볶아낸 간짜장은 나무랄 데 없다. 단무지와 양파에 곁들여 나오는 깍두기나 김치는 또 어떻고.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취향일 뿐이다. 소문 듣고 갔다가 “애걔~~~” 할 수도 있으니까.

중국집 (CABOOKS)
26년차(2018년 당시) 피아노 조율사의 26년 된 취미, 중식 노포 탐방기
피아노 조율을 마치면 비밀 수첩을 꺼내 들고 중국집으로 발길을 옮기며 혼자 식사하는 취미를 책으로 엮었다. 오래된 가게, 평생 한 가지 일만 해온 사람들, 음식 하나에 삶을 녹여 놓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만화로 펼쳐진다. 단, 지금은 문을 닫은 노포도 제법 있다.
짜장면이냐? 간짜장이냐?
짜장면과 간짜장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다. 결론이 날 리 없다. 나는 단연 간짜장파다. 그것도 번듯한 대형 중식당보다 동네 중국집에서 볶아내는 간짜장. 주방에서 반죽을 팡팡 두드려 면 뽑아내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좋다. 바특하게 볶은 짜장(전분 많이 풀어 흥건하면 실망), 탱탱한 면(너무 질기면 곤란), 채 썬 오이(완두콩은 사양), 테두리가 바삭한 달걀 프라이(삶은 달걀이나 메추리알은 별로). 이 조합이 완벽해야 한다.
“간짜장이요, 곱빼기!”
주렴을 걷고 들어가며 단호하게 외친다. 따뜻한 엽차를 홀짝이다 보면 덜그럭 거리는 웍 소리가 들린다. 위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양파를 춘장에 찍어 한입 물면 주방에서 출발한 고소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단무지에 식초 뿌려 아삭아삭 씹다 보면, 마침내 기다리던 한 그릇이 대령한다.

간짜장은 짜장면의 일종으로, 물이나 육수를 붓지 않고 만든 짜장을 말한다.
‘간짜장’의 ‘간’은 내장 간이나 소금 간 등의 간이 아니고 乾(마를 건)의 본래 발음이다. 즉, 현대식으로 적으면 건짜장이 되며 일반 짜장과는 달리 물을 넣어 양을 늘리지 않는다.
또, 양념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바로 볶아서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원래 짜장면은 주문을 받고 볶는 건짜장 방식이었으나 1970년대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물이나 육수를 첨가해 묽게 만들고 점도는 전분으로 처리하는 ‘물’짜장이 등장하면서 ‘물'짜장이 일반 짜장면으로, 이전의 그 짜장면은 간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간짜장은 물이나 육수를 넣는 일반 짜장과 달리 육수 없이 볶아 만들기 때문에 춘장 맛, 불맛이 강한 편이다. 즉, 맛이 상대적으로 진하다. 일반 짜장과 간짜장의 차이는 소스를 따로 내느냐 면에 부어 내느냐 또는 어떤 재료를 쓰느냐가 아니다. 물과 전분을 추가로 넣느냐가 핵심이다. 부어 내더라도 물 안 넣고 볶아 내면 간짜장, 소스를 따로 담아 내고 아무리 고급 재료를 넣더라도 소스에 물과 전분을 넣으면 그냥 짜장이다. 해물이나 특이한 재료가 들어가면 이름은 달라지겠지만 물짜장이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즉 간짜장-일반 짜장은 소스 조리법의 차이에 따른 이름이다. 유니짜장이면서 간짜장일 수 있고, 삼선짜장이면서 물짜장일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짜장면 전성시대 1970~80년대
그 시절 짜장면은 말 그대로 국민음식이었다. 김치찌개와 짜장면을 함께 파는 식당도 꽤 있었으니까. 중국집 카운터 앞에는 커다란 관내 지도가 걸려 있었다. 면이 불지 않는 거리가 배달 한계선이었다. 오토바이가 자전거를 대체하며 배달 거리는 점점 늘어났고, 면발도 따라 변했다.
이 변화는 한국의 경제 성장과 맞닿아 있다. 1960~80년대 한국은 연평균 8~10%의 고도 성장기였다. 1973년에는 무려 14.9%였다. 본격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며 도시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는 구호 아래 공장들은 밤낮없이 돌아갔다.
덩달아 외식업도 번창했다. 하지만 쌀은 부족했다 (쌀 자급 원년은 1977년이다). 정부는 혼·분식 장려 운동을 펼쳤다. 말이 장려지 사실상 강제였다. 식당에서는 쌀에 보리를 25% 이상 섞어야 했다. 학교에 규정을 어긴 도시락을 가져가면 도덕 점수를 깎거나 회초리로 맞기까지 했다. 쌀로 술을 빚을 수도 없었다. 아예 1969년 2월부터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했다. 이날이면 식당들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밀가루 음식만 팔아야 했다.
덕분에 중국집들은 신이 났다. 주방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배달통은 바닥에 놓일 시간이 없었다. 이즈음 면에 쫄깃함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밀가루 반죽이 소다(탄산칼륨, 탄산나트륨)와 만나면 면이 더 찰지고 삶아도 퍼지지 않는다. 배달 시간이 길어져도 면발이 탱탱하니 배달원들이 욕먹을 일도 줄었다. 짜장면발 본래의 맛은 추억이 되어갔다.
그 시절에는 짜장면 값을 마음대로 올리지 못했다. 쌀과 밀가루 같은 주식, 설탕과 소금 등의 필수 식재료, 백반 국수 짜장면 라면 같은 서민 음식값은 정부가 관리했다. 저임금 노동에 바탕을 둔 수출 위주 정책을 지탱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 초반 짜장면 한 그릇은 50~100원, 후반에는 200원 안팎이었다.
중국집들도 꾀를 내서 대응했다. 면의 양을 줄이고 메뉴에 곱빼기를 추가했다. 해삼 전복 새우 등을 넣은 삼선짜장처럼 통제권 밖의 파생 메뉴도 인기를 끌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며 가격통제는 느슨해 졌다. 1990년대 들어서며 짜장면 값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건립된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공화춘은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공화춘은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들이 모이는 동향회관의 성격으로 출발해 1913년부터 1983년 폐업할 때까지 대표적인 중국집으로 명성을 날렸다. 공화춘은 개항 이래 한국 땅으로 새 삶을 찾아 건너온 화교들의 애환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출처 : 역사문화재단)
짜장면 맛의 변화와 화교의 부침
한국 중식의 역사는 곧 짜장면의 역사다. 그 속에는 화교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다. 그들의 일상은 늘 불안했다. 2002년 영주권이 부여되기 전까지는 일정 기간마다 거주 연장 허가를 받아야 했다. 박정희 정권 때는 50평 이상의 점포를 소유할 수 없었다. 공무원이 될 수 없고, 변호사나 의사처럼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증을 딸 수도 없었다. 믿을 구석은 기술 밖에 없었다. 많은 화교들이 중식도를 잡을 수밖에 없던 이유다.
세월이 흐르며 짜고 투박한 산둥식 자장몐은 한국식 짜장면으로 진화했다. 갖가지 재료와 조리 기술이 더해지며 한국 대표 음식이 됐다. 이제는 수많은 짜장면 브랜드가 생기고, 면도 다양해졌다. 이민의 신산한 삶, 너와 나의 이야기가 스며 있는 짜장면은 그래서 ‘역사’요 ‘문화’다.
최근 개봉한 영화 ‘승부’에는 이창호가 한국기원 옥상에서 혼자 짜장면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먹었던 최고의 짜장면도 바둑과 얽혀 있다. 학창 시절 친구와 종종 바둑을 뒀다. 기원에 갈 돈이 없던 우리는 바둑돌과 바둑판을 챙겨 다녔다. 캠퍼스 벤치나 공원에서 수담을 나누며 먹는 짜장면은 당구장 짜장면 저리 가라였다. 바둑에 몰두하다 면이 불어 터져도 그만한 맛이 없었다.
그 시절 짜장면이 생각날 때마다 찾는 곳이 있다. 서울 서교동에 있는 작은 중식당 ‘진향’이다. 칠순의 왕육성 사부가 오늘도 손수 웍을 잡는다. 내공 넘치는 짜장면을 비벼 한 젓가락 입에 넣는다. 잊고 지냈던 맛이 떠오른다. 마지막 남은 단무지로 그릇을 훑으며 나직이 말한다. 짜장면 만세, 간짜장 만만세.

글 안충기 작가
現 법률신문 기자
前 중앙일보 오피니언 비주얼에디터 / 중앙SUNDAY 아트전문기자 / 중앙일보 편집국 섹션에디터
서울대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뒤, 기자이자 펜화 작가로 활동중.
국토와 지리, 음식, 미술 등다양한 방면의 글을 쓰고 있다. 개인전,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 초대전을 비롯해 모두 17회의 펜화 전시회를 열었다.
그림과 글을 곁들여 〈비행산수〉, 〈긴가민가〉, 〈공간탐색〉, 〈한국의 명당〉 등의 시리즈 기사를 연재했으며 펜화 작품집 《비행산수:하늘에서 본 우리 땅》과 미쉐린 가이드 스타 식당 이야기 《진진, 왕육성입니다》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