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난면방 김낙영 셰프 인터뷰
서교난면방 김낙영 셰프 몇 해 전부터, 서교동의 조용한 골목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가게가 있다. 겉모습은 익숙한 생면 파스타지만 그 안에는 계란 반죽의 탄성과 한식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서교난면방’. 이곳은 생면 요리를 중심으로 한식과 이탈리안을 잇는 작은 전문점이자 셰프의 철학이 온전히 스며든 식당이다. 셰프는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배우고, 한국의 고(古)조리서 속 ‘난면’이라는 전통 면 요리와 만났다. 그는 기술을 바탕으로 과거의 레시피를 새롭게 해석하고, 매일 반죽의 온도와 습도를 살핀다. “저에게 생면은 제 요리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다양한 생면에 어울리는 소스와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가 제 삶이 되었어요.” 김낙영 셰프와의 인터뷰에는 오랜 시간 한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평양냉면 커뮤니티
그야말로 고수가 나타났다.평양 옥류관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의 모든 평양냉면 집을 뇌에 각인 시킨 6명의 평양냉면 리뷰전문가들이다. 그들의 평양냉면 이야기는 한국과 북한을 넘어 일본, 미국, 유럽까지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평양냉면을 사랑한 남자들…무심한 듯 담담한 맛에 빠져 오늘도 '냉면담화'가 길게 이어진다.냉면집 하나하나의 역사와 비하인드 스토리, 맛에 대한 기억은 물론 그 맛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심지어 그 가게의 매출까지… 질문 버튼을 누르면 무엇이든 답이 나온다.자가제면 냉면집의 면 뽑는 소리만 들려도 설레기 시작한다는 그들의 사랑은 육수보다 진하고 면보다 구수하다. 평양냉면 커뮤니티 회장님께서 엄선한 6명의 회원님들 그들의 평냉 내공은 감탄을 자아낸다 김지인 페이스북 평양냉면 커뮤니티 회장㈜그램퍼스 대표이사
나의 청춘, 나의 인생 냉면 (최옥숙)
싱그러운 여름이 오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단골냉면집으로 달려간다. 살얼음이 낀 육수 안에서 찰랑거리는 냉면 가락은 어김없이 나를 꿈 많던 20대 젊은 날로 되돌려놓는다. 어린 시절 내 꿈은 가수였다.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에도 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당시 나는 화성학을 비롯해 피아노와 기타 등 각종 악기들을 배웠는데, 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 쉬는 날도 없이 이집 저집으로 품을 팔러 다녔다.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하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성공하고 싶어 열심히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내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밴드를 결성하게
이모님의 열무국수 (정승권)
나에게는 낳아주신 어머니 외에 또 한명의 어머니가 있다. 학창시절 내가 하숙을 했던 곳의 이모님이다. 과거 시골에서 살았던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계기로 인근 도시로 나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하숙집을 처음 찾아간 날, 푸근한 인상의 하숙집 아주머니는 바짝 긴장한 내게 다가와 자신을 이모처럼 생각하라며 반겨주었다.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집을 떠나 유학까지 왔는데 성적이 나쁘면 안 된다는 강박감, 아는 사람 한명 없는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춘기의 외로움, 하숙집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야하는 어색함이 내성적인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학교에서도, 하숙집에서도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푸근한 인상처럼 인심까지 넉넉했던 하숙집 이모님은 밤늦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특하다며 매일 저녁 간식까지
한여름, 2호선 끝에서 만난 추억 (임강민)
여름의 맛이란 뭘까.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고 난 뒤 마시는 시원한 음료수? 아니면 후텁지근한 저녁, 선풍기 바람 쐬며 먹는 수박 한 조각? 나에게 여름의 맛은, 12년 지기 친구와 함께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45km의 2호선을 걷고 난 뒤 맛본 메밀소바 한 그릇이다. 그건 단순한 음식을 넘어, 땀과 지침 끝에 찾아온 달콤한 선물이자, 친구와의 끈끈한 우정이 담긴 특별한 여름 면이었다. 작년 늦은 여름, 우리는 무모한 도전을 하나 계획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을 따라 45km를 두 발로 걷는 배낭여행.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만, 12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함께 겪어온 친구와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인 신분이던 나는 포항에서
하얗고 진한 거짓말 (이인희)
나는 콩국수 앞에서 종종 거짓말을 했다. 스물 셋, 지하철 요금과 밥값 사이에서 늘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던 취준생 시절. 턱없이 비싼 토익학원 수강료를 감당하기 위해 조교로 일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계절이었다. 오래된 에어컨이 웅웅 대는 여름, 반복되는 문제와 실수들. 나는 자꾸 틀렸고, 칠판을 지우고 프린트를 나눠주다 보면 끼니 시간이 되었다. 학원 지하의 분식집에서 잔치국수나 산채비빔밥을 사먹었다. 메뉴 중에서 손으로 직접 갈았다는 콩국수는 유독 비쌌다.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강사님들이 “수고했어”라고 말한 날에야 먹을 수 있는 메뉴였다. 맛은 없었다. 밍밍하고 꾸덕하고,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모르겠는 그 음식. 부드럽다 못해 느끼한 콩물 속에 남긴 면발을 슬쩍 숨겼다.
한입의 시원함, 한순간의 위로 (이형민)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다시 발을 내딛는다는 건 단순한 복귀가 아니었다. 나에겐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복학 대신 보컬 입시라는 길을 택한 나는,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무더운 여름을 피할 틈도 없이 하루 12시간 가까이 소리를 내야 하는 곳이었다. 연습실 안은 무대보다 더한 열기로 가득했고, 연습이 끝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특히 한여름의 오후, 그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반복되는 발성 연습과 곡 해석은 체력과 정신력 모두를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몇 시간째 똑같은 구절을 반복하고, 피아노 반주에 맞춰 수십 번이나 같은 멜로디를 불렀다. 하지만 점점 목은 잠기고,
아들의 여름, 평양냉면 한 그릇 (선혜정)
우리 가족은 네 사람.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나.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같은 대화를 나눈다. 한창 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8월 3일, 아들의 생일이 다가오면 나는 묻는다. “생일엔 뭐가 먹고 싶어?” 대답은 언제나 같다. “평양냉면이요.” 단순하고 익숙한 말이지만, 그 한마디에 우리 가족의 여름 풍경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아들의 생일은 한여름의 한가운데다. 해는 유난히 길고, 공기는 눅눅하며, 바람조차 더운 기운을 머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마다 하나의 약속처럼, 평양냉면을 먹으러 간다. 도곡동 평양냉면집. 2018년 처음 그곳을 찾았던 날은 동네 식당이라는 이유만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때였다. 그땐 평양냉면이 슴슴하다는 것도 잘 몰랐다. 아이는 아직 작고, 얼굴엔 말간 미소가 가득했는데,
초계국수 가족 (서현정)
불임(不姙). 마음 따뜻한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 나에게 생각지도 않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찾아간 난임 병원에서 임신이 어렵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우리 부부를 꼭 닮은 아이를 갖는 것이 소망이었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시험관 시술을 거듭하며 임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면서 우리 부부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갔다. 가슴 속이 전쟁 후의 폐허처럼 허허로웠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하루하루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봄날, 기적처럼 자연임신으로 아이가 찾아왔다. 머지않아 품에 안길 아이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고, 아이와 눈 맞춤할 그날을 상상하니
물냉으로 연애를, 비냉으로 사랑을 배우다 (문소희)
냉면에도 철이 있다. 매년 여름이 되면 냉면이 생각난다. 그건 계절 탓이라기보다 어떤 추억이 철따라 돌아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늘 물냉파였다. 그 시원하고 새콤한 국물은 여름날 내게 가장 확실한 위로였다. 비냉은 복잡했다. 맵고, 진하고, 감정처럼 얽힌 맛 같아서 꺼렸었다. 여름이면 항상 물냉 vs 비냉을 두고 고민했지만 결국 물냉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 입맛은 단순하고 명확한 걸 좋아했으니까. 예전엔 그런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이 가장 좋았다. 내가 물냉을 좋아하니, 너도 물냉이면 우리는 인연이겠다 싶었다. 정말 그렇게 만난 사람이 있었다. 같은 과 선배였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우리는 시원한 연애를 시작했고, 첫 데이트 메뉴가 냉면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