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 우리집엔 눈이 내렸습니다.
창밖의 겨울 왕국이 아닌, 따스함 가득한 거실 한복판에 말입니다.
이십년도 더 지난 기억이지만 뼛 속까지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그 날의 밀가루 눈은 어김없이 제 마음 속에 소복하게 쌓여
내립니다.
성인이 된 두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의 겨울날이었습니다.
연일 이어진 한파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는 집안의 공기를 위태롭게 들썩이게 했습니다.
‘무엇을 하며 이 지루한 오후를 보내야할까?’ 고민끝에 제가 꺼내 든 것은 거창한 장난감이 아닌, 주방의 수납장 속에서 꺼낸 뽀얀 밀가루 한 봉지였습니다.
거실에 커다란 비닐을 깔고 밀가루를 쏟아부어 주자, 그 순간 작은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고사리 같던 두 아이의 손이 밀가루를 헤집고, 파고, 뿌릴 때마다 하얀 입자가 부드러운 먼지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질 때마다 밀가루 포자가 온 집안으로 흩낱렸고, 머리카락과 속눈썹 위에도 하얗게 내려앉았습니다.
“엄마, 눈사람이다!”
첫째가 거울을 보며 깔깔거렸습니다. 정말이었습니다.
거실은 삽시간에 고요한 설원이 되었고, 아이들은 온 몸으로 겨울을 만끽하는 작은 탐험가들처럼 밀가루의 부드러운 감촉에 한없이 빠져들었습니다.
뽀얀 세상에서 충분히 뒹군 아이들을 가만히 앉혀놓고 밀가루를 모아 물을 조금씩 부어주자 마법의 두번째 장이 펼쳐졌습니다.
가루가 반죽으로 변하며 쫀득하게 뭉쳐지는 신기한 모습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그때 문득 이왕이면 더 재미있는 놀이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냉장고를 열어 색깔을 낼 수 있는 재료들을 꺼내 들었습니다.
당근을 곱게 갈아 주황빛 반죽을 만들자 첫째가 그 반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외쳤습니다.
“엄마, 해 같아!”
말린 치자를 우려낸 물로 노란빛 반죽을 만들자 둘째가 “달님이다!”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시금치를 으깨어 초록빛 반죽을 만들자 “숲속이다!”하며 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하얀 도화지 같던 밀가루 반죽은 아이들의 상상력 속에서 우주가 되고 동화가 되었습니다.
옷과 얼굴이 반죽 투성이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색색의 반죽을 조물락거리고, 길게 늘이고, 동그랗게 뭉치며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어느덧 놀이는 요리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손에 하나씩 쥐여준 플라스틱 칼과 미니 밀대로 아이들은 사뭇진지한 표정으로 저를 따라 반죽을 밀고 썰기 시작했습니다.
삐뚤빼뚤 제멋대로인 모양이면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국수 면발이 작은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멸치 육수가 끓는 냄비에 감자와 호박을 썰어넣고 아이들이 만든 알록달록한 면들을 조심스럽게 투하했습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속에서 색색의 국수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동화같았습니다.
드디어 완성된 ‘우리들의 칼국수’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특별했습니다.
한 그릇씩 받아 든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국수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 후후 불어 한입 가득 넣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엄마, 이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그 행복한 표정, 만족감으로 빛나던 두 뺨은 제 마음속에 찍힌 가장 선명한 사진이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함께 먹었던 것은 단순한 칼국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보낸 시간이었고, 깔깔거리는 행복한 웃음이었으며, 서로의 온기였습니다.
시간은 흘러 밀가루 눈을 맞으며 놀던 아이들은 훌쩍 자라 각자의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제 찬 바람이 불어와도 주방에서 밀가루를 꺼내들면 예전처럼 놀아달라 조르는 아이들은 곁에 없습니다.
텅 빈 식탁을 바라보며 수제비를 만들까, 칼국수를 만들까 잠시 고민에 잠기기도 합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혼자 칼국수를 만들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반죽을 밀대로 밀면서 일부러 삐뚤빼뚤하게 썰어보았습니다. 제멋대로인 면발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냄비에 면을 넣을 때, 그 때처럼 밀가루를 살짝 허공에 뿌려봤습니다. 하얀 가루가 눈처럼 날리더니.
그 순간, 시간이 겹쳐졌습니다.
까르르 웃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고사리 손으로 반죽을 치대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비록 같이 만들지는 못해도 제게는 세상 가장 든든한 레시피가 있습니다. 눈처럼 흩날리던 밀가루의 추억, 알록달록한 반죽을 만들며 빛나던 아이들의 눈빛, 제멋대로인 칼국수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며 먹고 웃어주던 그 행복한 미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저는 또 다시 가장 행복했던 그 날로 돌아갑니다. 추억은 이토록 따뜻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삶을 배부르게 합니다.
글쓴이 : 김미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