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멀고 부산은 가까웠다
피난과 냉면의 단절
축복받은 탄생은 아니었다. 부산 밀면은 ‘냉면 대용품’일뿐이었다. 냉면이 위풍당당한 가문의 적자(嫡子)라면, 밀면은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서자(庶子)랄까. 사실 밀면은 부산 전통 향토 음식이 아니다. 그 역사가 60여 년에 불과하다. 부산 토박이가 아닌, 전쟁에 떠밀려 피란 내려온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만들어냈다.
냉면을 제대로 뽑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먹던 밀면은 이제 부산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부산 토박이로 음식 문화에 해박한 시인 최원준 씨는 “부산의 ‘아싸리’ 정신이 투영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밀면에는 ‘기면 기고 아이면 아이다’라는 부산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얼큰하게 맵고 짠 국물을 훌훌 들이마시며 ‘어허, 시~원하다!’고 하는 부산 사람의 성정이 반영됐죠.”
밀면은 언제 어디서 개발됐는지가 드물게 명확한 음식이다. 1959년 부산 남구 우암동 ‘내호냉면’에서 처음 만들었다. ‘소막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우암동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팔려 가는 소가 모였다.

“부산 최초 밀면 제조”를 내세운 내호냉면의 간판
©Bohemihan 네이버 블로그
전쟁이 터지자 우사(牛舍)에 피란민이 들어가 살았다.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소막마을은 ‘피란 수도 유적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우암동에 정착한 피란민은 함경도 출신이 많았다. 내호냉면 1대 대표 고(故) 이영순 여사가 흥남 출신이다. 이 여사는 흥남 내호리에 1919년 문을 연 ‘동춘면옥’에서 일했다. 부산 내호냉면은 1953년 개업했다. 처음에는 냉면만 팔았다.
하지만 6·25전쟁 휴전 뒤 감자나 고구마 전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50년대 우암동 소막마을 모습 ©소막마을 홈페이지
밀가루는 미국에서, 육수는 기억에서
다시 태어난 냉면
이 여사는 미국이 구호물자로 제공하면서 값싸고 흔해진 밀가루로 면을 뽑기 시작했다. 밀가루만으로 뽑은 면은 향이 없고 뚝뚝 끊어졌다. 밀가루와 전분을 7대 3 비율로 섞었다. 밀가루로 만든 냉면이라고 해서 ‘밀냉면’이라 이름 붙였지만, 언젠가부터 다들 ‘밀면’이라 불렀다.
밀가루로 함경도식 농마국수를 만들자 달라진 재료로 인해 자연스레 변해갔다. 농마국수는 전분으로 뽑은 가늘고 질긴 국수에 함흥에서 많이 잡히는 가자미로 만든 식해를 매운 양념장과 함께 올려 먹었다. 반면 밀가루를 주재료로 뽑는 밀면의 면발은 부드러운 만큼 두꺼워졌다. 꾸미도 자연스럽게 순해졌다.
피란민들에게 밀면은 할 수 없이 먹는 대타였다. 심지어 밀면을 개발한 내호냉면 창업주들도 “밀면은 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이라며 냉면을 선호했다. 최 시인은 “밀면 가격도 냉면에 좌지우지됐다”라고 했다.
“냉면 값의 절반이 밀면의 값이 되어, 주머니 가벼울 때 냉면 대신 밀면을 먹거나 두 사람이 함께 먹어야 할 때 한 사람 가격으로 먹던 음식이 밀면이었습니다.”
부산에는 여전히 ‘밀면은 여름에 저렴하고 시원하게 먹는 음식’이라는 정서가 남아있다. 박종호 부산일보 선임기자는 “밀면은 여름 한철 시원한 맛에 싸게 먹는 거지, 1만 원씩 주고 먹을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연제구 연산동 ‘국도밀면’은 이러한 정서를 여전히 품고 있다. 이 집 밀면은 단돈 4000원. 곱빼기가 5000원인데, 단골만 찾는 ‘반곱’도 있다. 국도밀면에서는 짜장면도 함께 파는데, 밀면이 워낙 흔한 데다 여름 음식으로 인식되는 부산에서는 크게 희한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중국집에서 여름 한 철만 중국냉면이나 콩국수를 파는 식이죠.”
가야밀면은 냉면 대용품이라는 콤플렉스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밀면을 당당하게 내세운 집이다. ‘밀면의 완성자’라고도 불린다. 1969년 부산진구 가야동 동의대역에서 언덕이 시작되는 부근에 문 열었다. 냉면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서일까, 가야밀면에서는 면을 100% 밀가루로 뽑기 시작했다.
맛과 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밀가루 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당귀·감초 등 한약재를 더해 달달한 육수를 만들었고, 새콤달콤한 양념을 듬뿍 얹었다. 원조 가야밀면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부산에는 상호에 ‘가야’가 들어가는 밀면집 수십 곳이 성업 중이다.

밀면의 시작, 내호냉면의 한 그릇
©여기있써영 네이버블로그

밀면을 당당히 세운 원조, 이제는 추억이 된 가야밀면
©먹꾸름 네이버 블로그

밀면 4000원에 판매 중인 국도밀면의 메뉴판
©다이닝코드

생존음식에서 향토음식으로
부산의 명물국수가 되다
이제 밀면은 부산에서 여름과 동의어다. “밀면집 앞에 줄이 늘어서기 시작하면 여름이 시작한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부산 사람들에게 ‘밀면 맛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그런 희한한 질문을?’이라고 묻는 듯한 눈빛을 돌려받기 십상이다. 이들에게 밀면이란 “집에서 제일 가까운 집”에서 먹지, 일부러 멀리 찾아가는 음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2025년 현재 부산 최고 밀면집을 가려봤다. 음식·외식업계 전문가 10명에게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부산 밀면집을 10곳씩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본인과 관련된 곳은 배제했다. 1등부터 10등까지, 각각 10점부터 1점까지 매겨 합산했다.
‘국제밀면’(1위) ‘대가면옥’(2위) ‘사철밀면’(3위) ‘춘하추동’(4위) 등 이른바 3세대 밀면집들이 1·2세대를 제치고 우위를 차지했다. 밀면을 처음 만든 ‘내호냉면’(6위) 등 1세대, 밀면의 기본 틀을 완성한 ‘가야밀면’ 계열의 ‘삼성밀면’(5위)과 ‘소문난가야밀면’(8위),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는 ‘원조개금밀면’(7위) 등 2세대도 여전히 만만찮은 세를 유지하고 있다.
1~4위에 오른 ‘국제밀면’ ‘대가면옥’ ‘사철밀면’ ‘춘하추동’은 새로운 밀면의 진화를 시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기준은 밀면에 익숙한 부산 사람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보편성이다. 선정 패널들에게 “균형이 뛰어나다”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얻었다.
“실향민의 한과 서러움이 모두 빠져나간 채, 음식으로만 승부하는 시대의 세련된 맛.”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3세대 밀면집들에 대한 박정배 음식 작가의 총평이다.

살얼음 동동, 자극 없이 정교한 맛의 국제밀면
©마윤 네이버 블로그

면발과 도톰한 사태 고명이 조화를 이루는 대가면옥
©쩡쓰 네이버 블로그
1위를 차지한 ‘국제밀면’은 소뼈를 사용한 맑은 육수를 살짝 얼려 살얼음이 동동 뜬 채 나온다. 사골 육수 특유의 구수한 맛이 가늘고 쫄깃하면서 탄력이 뛰어난 밀면과 정교하게 어우러진다. 양념장을 풀면 시원하고 맑은 국물이 빨갛게 물들지만 과하게 맵지 않다. 단맛도 섬세하기는 마찬가지. 튀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입안에서 전체적으로 둥글다는 느낌을 준다.
올해로 20년째라는 ‘대가면옥’ 주인은 “아버님이 평안북도 출신이지만 우리 집 밀면은 그것과는 상관없다”라고 했다. 100% 밀가루를 반죽해 냉면처럼 국수틀에 넣고 압출한 면발은 평양냉면의 메밀면이나 함흥냉면의 전분 면과는 또 다른 완성도를 보여준다. 육수 삶고 남은 퍽퍽한 고기가 아니라 소 사태를 따로 삶아 도톰하게 저며서 올려주는 고명도 정성이 느껴진다.
‘사철밀면’도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이 면과 육수의 장점을 가리지 않고 부각한다.
4위에 오른 ‘춘하추동’은 강한 한약재 냄새가 특징이다. 그런데 그 냄새가 거북하지 않다. 육수 기본인 한우 사골과 잘 어우러지며 깊은 맛을 낸다. 이 집만의 개성 또는 시그니처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고명으로 얹는 돼지고기에서도 비슷한 향이 난다.
5위에 오른 부산진구 초읍동 ‘삼성밀면’은 가야밀면 창업자 고 김봉만 씨와 함께 밀면을 만들던 여동생이 운영하는 집으로, 원조 가야밀면의 맛을 비교적 충실하게 유지한다고 평가받는다. 춘천 쟁반막국수를 연상케 하는, 자박한 국물에 국수를 조물조물 비벼서 내주는 ‘주물럭밀면’은 다른 집에서 찾기 어려운 메뉴다.
연제구 거제동 ‘소문난가야밀면’은 8위를 차지했다. 100% 밀가루 면과 한약재 향 물씬 나는 달큼한 국물, 매콤 새콤달콤한 양념이라는 가야식 밀면 유전자를 공유한다.
‘내호냉면’은 6위에 올랐다. 이 집 밀면은 냉면에 가깝다. 대부분 냉면집처럼 소[牛]를 기본으로 하는 육수를 쓴다. 소 사골에 쇠심줄·사태 등을 넣고 육수를 뽑는다. 고명도 함흥냉면처럼 매콤 새콤달콤하게 무친 가오리회를 쓴다. 밀면과 함께 냉면도 여전히 판다. 냉면은 고구마 전분만으로 면을 뽑고, 밀면은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 반죽해 뽑는다.
7위에 오른 ‘원조개금밀면’은 요즘 가장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밀면집이다. 닭고기를 기본으로 하는 맑은 육수로 유명하다. 하얀 면발, 붉은 양념장, 초록색 오이, 닭고기로 오해받는 실처럼 가늘게 찢은 돼지고기 꾸미, 삶은 달걀 반쪽이 맑은 갈색 국물에 담겨 나온다. 단맛과 개운하면서 과하게 자극적이지 않은 육수가 한 모금만 맛봐도 가야식 밀면과 차이가 느껴진다.
남구 용호동 ‘부산약콩밀면’은 밀가루에 약콩(쥐눈이콩) 가루를 섞어 면을 뽑는다. 가게 주인은 나이 지긋한 단골들이 “나이 들수록 면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된 데이”라는 말을 듣고 속이 편한 밀면을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연구를 거듭하던 중 “어릴 때 약콩 가루를 넣어서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라는 어머니 말에서 착안, 밀가루와 약콩 가루를 섞어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면을 만들어냈다. 주인 고향이 경북 안동, 주인의 어머니가 안동과 맞붙은 영주 출신. 이 지역에서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2 대 1~3 대 1 정도로 섞는 전통이 있다.
‘국도밀면’과 공동으로 10위에 오른 ‘시민냉면’의 밀면은 물과 비빔 구분이 없다. 비빔 형태 밀면이 육수가 든 주전자와 함께 나온다. 주전자에 담겨 나온 육수를 밀면에 부어 먹거나, 나중에 육수를 따라 먹는다. 강원도 춘천 막국수 문화와 닮았다. 이런 방식을 부산면 마니아들은 ‘당감동 스타일’ 또는 비빔밀면에서 물밀면으로 변신한다는 의미로 ‘트랜스포머’라 부른다.

원조개금밀면의 부드럽게 찢은 고명과 개운한 국물맛
@full_life_hope

부산약콩밀면의 약콩 가루로 뽑은 고소하고 부드러운 면
@minip2060

비빔과 물 사이, 취향 따라 조합하는 시민냉면
@anjuroad_busan

글 김성윤 기자
조선일보 음식전문 기자
2000년 입사해 기작 경력 대부분 음식 분야를 취재해왔다.
세계슬로우프드협회가 설립한 이탈리아 미식학대학 (UNISG)에서 ‘이탈리아 지역별 비교 분석’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커피 이야기’ ‘식도락계 슈퍼스타32’ ‘세계인의 밥’ ‘이탈리아 여행 스크랩북’ ‘음식의 가치'(공저)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