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촌 옥탑방의 추운 겨울, 짬뽕 곱빼기 한 그릇으로 버티던 스무 살 삼총사의 뜨겁고 매운 연대기입니다.
불안과 우정이 뒤섞인 그 시절의 맛이 세월이 흘러도 식지 않는 청춘의 온도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에세이입니다. ”

2009년 스무 살의 신촌은 지금의 고요함과 달리 광란의 에너지로 넘실대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등록금과 취업 걱정을 잊게 해주던 그 시절, 우리의 보금자리는 신촌 최고층에 위태롭게 얹힌 낡은 옥탑방이었다. 사방에서 찬바람이 새어 들어 겨울이면 냉장고 속처럼 외풍이 밤새 우리를 괴롭혔다.
09학번 여자 삼총사가 이곳에 모인 것은 우연이었다. A는 등록금 때문에 알바를 뛰었고, B는 미래 불안으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옥탑방 주인인 나는 그들과의 동거가 불편했고, 특히 ‘맵찔이’인 나와 ‘맵순이’인 친구들의 극명한 식성 차이는 가장 큰 불만이었다. 하지만 두 친구는 “매운 걸 견뎌야 옥탑방에서 버틴다”며 나를 스파르타식 매운맛 교육에 몰아넣었다.
밤샘 과제를 하거나 고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새벽, 육체적인 피로와 영혼의 허기로 얼룩질 때마다 우리는 ‘짬뽕 긴급 회동’을 가졌다. 특히 A가 최저 임금도 안 되는 알바비를 떼였을 때, B의 공모전이 낙방했을 때, 짬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분노와 좌절을 태워버리는 폭탄’과 같았다. 신촌 대학가 구석, 낡은 골목 깊숙이 자리 잡은 허름한 중국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겉모습은 초라했지만, 새벽까지 뜨거운 불을 피워 올리는 신촌 청춘들의 은밀한 해방구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깥의 냉기가 무색하게 코끝이 마비될 듯한 기름 냄새와 마늘, 고추, 땀 냄새, 그리고 뜨거운 증기가 뒤섞인 후끈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늘 구석의 낡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가 앉자마자 미소 지으며 물어볼 필요도 없이 주문을 외치셨다.
우리 삼총사의 주문 공식은 불변이었다. ‘짬뽕 곱빼기 1개, 공깃밥 3개’. 당시 짬뽕 곱빼기 가격은 5,500원, 공깃밥은 3,000원이었다. 이 조합은 총 8,500원. 각자 3천원씩만 내면 되는 이 조합은 우리의 얇은 지갑을 지키면서도 세상 가장 풍족한 만찬을 경험하게 해주는 유일한 사치였다.
이때부터 나의 짬뽕 시련은 시작되었다. 나는 땀을 쏟고,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거의 울다시피 짬뽕을 먹어야 했다. 매번 첫입을 넣을 때마다 속으로는 ‘아, 이번엔 포기할까?’ 고민했지만, 뜨거운 짬뽕을 후루룩거리는 두 친구의 강렬한 눈빛과 의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응원과 옥탑방의 냉기가 합쳐져, 그 매운맛이 단순히 고통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이기는 뜨거운 ‘무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먹을 때마다 눈물은 흘렀지만, 속은 이상하게도 후련했다. 쓰읍- 타들어갈 것 같은 혀끝과 식도의 감각이 묘하게도 안정이 되었다. 나는 점점 맵찔이에서 점점 진화하고 있었다. 그 시절 매운 짬뽕은 우리에게 혹독한 신촌의 겨울을 살아남기 위한 ‘의리의 국물’이었고, 이 고통스러운 청춘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의 불씨’였다.
그러던 어느날 A가 본인이 한 턱 쏜다며 짬뽕 긴급 회동을 소집했다. 그 날밤은 눈이 와서 배달을 시켜먹을까 고민했지만 A는 한사코 직접 그 중국집에 가야한다고 우리를 이끌었다. 중국집은 만석이었고 주문이 밀려 30분이 지나도록 우리의 짬뽕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A가 초조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나, 휴학해야할 것 같아.”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등록금을 내기 힘들 것 같다는 A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 앞으로 짬뽕 곱빼기가 나왔다. 짬뽕은 마치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붉은색 고추기름이 겉돌면서도 깊은맛을 내는 국물 위로, 푸짐한 오징어 조각과 양파, 그리고 알 수 없는 뼈들이 뒤섞여 증기를 뿜어냈다. 맵고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후려치며 코와 눈가를 순식간에 시큰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맵순이’였던 A를 위해 짬뽕에 고춧가루를 들이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른 흉내를 내며 어색하게 소주를 시켰다. A의 휴학 선언은 끓어오르는 짬뽕만큼이나 뜨겁고 매운 현실이었다. 평소처럼 유쾌하게 국물을 들이키던 A와 B도 그 순간은 말이 없었다. 맵고 뜨거운 국물과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쓴 소주의 대비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우리는 짬뽕 국물에 녹아들지 않는 현실의 쓴맛을 소주로 억지로 삼켜냈다. 나와 B는 눈빛만으로 결심했다. A의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전할 방법을. “맵찔아, 눈물은 짬뽕 때문에 흘려야지.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B는 A의 눈물을 막으려 더 맵게 고추가루를 섞었다. 그 밤, 짬뽕은 더 이상 희망의 불씨가 아니었다. 당장 직면한 이별 앞에서 발버둥 치는 우리의 슬픔이었다. 그 뜨겁고 매운 짬뽕을 비워낼수록, 우리의 청춘은 한 뼘 더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A와 B는 많이 취한 틈을 타 나는 처음으로 짬뽕값을 혼자서 계산했다. 그것이 우리 삼총사의 마지막 짬뽕회동이었다.
얼마 전, 나는 오랜만에 신촌 거리를 찾았다. 그때 그 자리에 중국집은 사라지고, 유리창 너머로 텅 빈 상가 공간만이 차가운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활화산 같던 신촌의 거리는 밤이 되어도 조용하다. 그 뜨거운 짬뽕의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차가운 겨울 공기와 고요함뿐이다.
지금도 동네 중국집에서 만 원을 훌쩍 넘어 만 이천 원에 육박하는 짬뽕 가격을 볼 때마다, 나는 그때 그 시절의 뜨거운 기억이 떠올라 코끝이 시큰해진다. 여자 세 명이 단돈 만 원으로 옥탑방의 추위와 청춘의 불안, 그리고 세 사람의 우정을 함께 녹였던 그 말도 안 되게 매웠던 짬뽕. 그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 한 그릇이 지녔던 ‘가치’와 ‘온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찬란했는지를, 현재의 물가와 텅 빈 신촌을 바라보며 더욱 절실하게 깨닫는다.
글쓴이 : 박은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