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날 아빠와 함께한 목욕탕의 추억, 그리고 중국집에서 어른짜장 하나, 아기짜장 하나를 나누었던 기억을 그렸습니다.
유년의 따뜻함과 그리움, 그리고 이제는 아빠가 되어 비로소 깨닫게 된 ‘아기짜장’의 사랑과 의미를 담아낸 에세이입니다. ”

겨울이 오면, 문득 아빠의 얼굴이 떠오른다.하얀 입김이 퍼지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늘 웃으며 돌아오던 그분의 모습이.
아빠는 늘 겨울에만 집으로 돌아왔다.
해외에서 일하시던 아빠는 연말이 되면 한 달 남짓한 휴가를 받아 오셨다.
그 시기는 나에게 마치 산타클로스의 계절이었다.
아빠가 공항에서 들고 오는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들, 낯선 나라의 향이 스며든 초콜릿과 장난감들. 그 모든 것이 그해의 크리스마스보다 더 큰 설렘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내 어린 시절의 산타클로스였다.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우리 아들, 보고 싶었지?”라며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던 그 품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가장 따뜻한 온도다.
추운 겨울날, 아빠와 나는 늘 목욕탕에 갔다.김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대중탕의 문을 열면, 싸늘한 공기 대신 후끈한 열기가 나를 감쌌다. 아빠는 내 손을 꼭 잡고 뜨거운 물에 천천히 몸을 담그셨다.“아, 이 맛에 겨울이지.”그렇게 말하며 아빠는 웃으셨다.
얼굴 가득한 김 사이로 보이던 그 미소는, 그 어떤 온탕보다 따뜻했다.
목욕을 마치면 늘 이어지는 코스가 있었다.
바로 근처 중국집이었다.문을 열면 고소한 기름 냄새와 뜨거운 국물 향이 한꺼번에 코끝을 자극했다.“어른짜장 하나, 아기짜장 하나요.”아빠의 단골 멘트였다.나는 그때 진심으로 ‘어른짜장’이라는 메뉴가 따로 있다고 믿었다.
어린 나에게 ‘어른짜장’은 아빠처럼 어른이 되어야만 먹을 수 있는 멋진 음식 같았다.
짜장면을 다 먹고 나면 아빠는 종종 내 입가에 묻은 검은 소스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셨다.“우리 아들, 다음엔 어른짜장 먹을까?”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난 아직 아기 짜장이 좋아요!” 하고 웃었다.그 웃음소리 속에서,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의 일요일 저녁은 늘 아빠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멀리 있는 아빠에게 엄마는 한 줄 한 줄 정성스레 편지를 쓰셨고,
나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빠 보고 싶어요. 또 같이 목욕탕 가요.”라고 적곤 했다.그때는 몰랐다. 그 짧은 문장들이, 훗날 내 마음의 가장 깊은 편지가 될 줄은.
시간은 흐르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봄이었다.이번엔 예상치 못하게 아빠가 봄에 오셨다.겨울도 아닌데 웬일일까,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선물 꾸러미 대신 병원 냄새가 따라왔다.“아빠가 조금 아프셔.”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병원에서 본 아빠는 내가 알던 아빠가 아니었다.늘 듬직하고 웃음 많던 얼굴은 수척했고, 손은 놀라울 만큼 차가웠다.
그리고 배는 임신 한것처럼 불룩 나왔고 다리는 엄청 말랐었다.간경화. 처음 들어보는 병 이름이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먼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피로가 아빠를 술로 이끌었고,
그 술이 결국 아빠의 간을 병들게 했다 했다.
의사는 시한부 3개월을 말했다.하지만 아빠는 그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오시던 겨울이 아닌 봄의 한가운데서 단 15일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로 내게 겨울은 더 이상 기다림의 계절이 아니었다.목욕탕의 김은 차가운 기억이 되었고, 중국집의 냄새는 먹먹한 그리움으로 남았다.그리고 “어른짜장 하나, 아기짜장 하나요.”라는 말은,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주문이 되었다.
시간은 다시 흘러, 어느새 나는 아빠의 나이가 되었다.그리고 내 곁엔 나를 꼭 닮은 아들이 있다.
눈이 소복이 내린 어느 겨울날, 나는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으로 향했다.그날의 공기, 그날의 온기, 그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아들을 데리고 뜨거운 물 속으로 천천히 몸을 담그는데, 문득 어린 시절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이 맛에 겨울이지.”
목욕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중국집으로 향했다.익숙한 듯,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주문했다.“어른짜장 하나, 아기짜장 하나요.”순간, 종업원이 “간짜장이요?”라고 되물었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른짜장은 간짜장이었구나.그 단순한 사실이 이렇게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간짜장을 젓가락으로 비비며 나는 아빠를 떠올렸다.뜨거운 짜장면의 김이 올라올 때마다, 목욕탕의 김처럼, 그때 그 미소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아빠, 보고 싶어요.”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그리고 그날, 내 아들은 내게 말했다.“아빠, 다음엔 어른짜장 먹을래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언젠가 너도 알게 되겠지.어른짜장의 의미를, 그리고 그 따뜻한 겨울의 온도를.
겨울이 오면, 나는 여전히 아빠를 만난다.목욕탕의 김 속에서, 간짜장의 향 속에서, 그리고 내 아들의 웃음 속에서.아빠는 여전히 내게 산타클로스다.단지 눈이 아닌, 추억 속으로 내려오는 하얀 겨울의 산타클로스.
그 따뜻한 웃음이,아직도 내 겨울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이 깊은 추억의 되물림을 절대
아들에게 하지 않겠다고, 나는 정말 건강한 산타클로스가 돼서
언제나 아들에게 추억을 선물 해주고 싶다.
이제 곧 다가올 겨울에 언제나처럼 사랑하는 아들 손을 붙잡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목욕탕에도 가고 중국집에 갈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여기, 어른짜장 하나, 아기짜장 하나요,”
글쓴이 : 김석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