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부인,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잖소!”
스포츠 경기, 게임판도 아니면서 규칙을 정해 놓은 음식이 있다. “포크는 왼손에, 나이프는 오른손에”, “밥 먹을 때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같은 매너에 대한 규칙이 아닌 먹는 방법에 대한 규칙을 정해 놓은 것이다. 원래 먹는 방법은 각자의 취향이라 규칙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평양냉면은 목소리 큰 몇몇 자칭 계승자들 덕분에 “이렇게 먹어야 한다”라는 규칙이 존재한다. 내가 알기로 그런 음식은 전 세계에서 평양냉면과 나고야식 장어덮밥 히츠마부시 정도다.
종업원이 가져온 평양냉면 한 그릇을 노려보며 손님은 스포츠 경기장의 선수로, 스타크래프트의 게이머로 변신한다. 규칙이 존재하는 음식이니까. 젓가락은 그의 유일한 무기, 숟가락이나 가위 따위는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 반칙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빨대는 꺼내는 순간 야유의 함성과 함께 퇴장이다. 계란을 먼저 먹을지 고명을 먼저 먹을지 공략법을 고민하고 냉면 그릇 속의 재료들을 하나씩 위장 속으로 해치운다.



진짜 평냉 러버들의 조용한 신념, 선주후면 인증사진
©jinhwan_y_89, naengmyeon_kr
면치기, 면은 공격의 대상이 아닌데 면을 친다는 표현을 쓴다. 냉면집 이곳저곳 다니며 먹는 식도락을 “도장 깨기”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 사람들은 평양냉면 먹는 행위를 여름 스포츠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수많은 평양냉면 관련 규칙 중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표현은 “선주후면(先酒後麵)”이다. 예전 평양 사람들이 손님이 오면 일단 술을 먼저 대접하고 냉면을 주었던 습관에서 비롯된 단어다. 산성 식품인 술과 알칼리성 식품인 메밀이 영양 균형을 이룬다는 둥, 술로 생기는 흥분과 열기를 메밀로 다스렸던 조상의 지혜라는 둥 아무 말들이 많은데, 세상 모든 식재료의 효능을 엎어버리는 것이 술 한 잔의 부작용이므로 선주후면에 대한 과학적 긍정적 해석은 사모님들끼리 주고받는 ”어머, 너 살 빠졌다“ 정도의 인사말 수준으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분위기를 여는 단정한 첫인사 같은 감홍로 © 경건한 마음 네이버 블로그


평냉 먹기 전 잔을 채우는 사람들 © koun.dining, dungbokc
평양 사람들이 술을 먼저, 면을 나중에 대접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면은 삶고 예쁘게 담아 나오는데 15분, 술은 1분 걸렸기 때문이다. 만드는 데 오래 걸리는 면을 먹기 전 술을 먼저 마실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던 것. 선주후면을 했던 다른 이유는 술은 어색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마법의 액체였기 때문이다. 처가 가서 장인어른과 술 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어색하고 지루한 지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1분 이상 대화를 유지하려면 앉자마자 술을 마셔야 한다. 일단 술 한 잔 마시고 얼큰해진 후 냉면을 먹는 편이 평양 남정네들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평양 사람들은 감홍로(甘紅露)라는 술을 마셨다고 한다. 달콤한(甘) 붉은(紅) 이슬(露),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달콤한 감홍로는 식전주(아페리티프)의 역할도 충분히 있었을 것 같다.

한 평양냉면 식당 벽면에 걸려 있는 선주후면 사자성어 © 로동집 네이버 리뷰
어쩌면 당연했던 술을 마신 후 면을 먹는 행위에 누군가 선주후면이라는 사자성어를 만들어 붙였다. 한자 성어는 사람들에게 “웬만하면 나도 지켜야 한다”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묘한 경향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인데 밥 먹고 하자면 당연히 지금 밥을 먹어야 한다고 공감하는 것과 비슷하다. 선주후면은 냉면 먹기 전 술을 먼저 마셨던 습관의 표현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걸 사자성어로 받아들여 평양냉면을 먹을 땐 술을 먼저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같이 냉면집에 간 남편도 “어허 부인, 선주후면이라는 말 못 들었소!”라며 당당하게 술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부인을 타박한 아저씨가 옆 테이블에서 술잔을 맛있게 빠는 순간 나의 새로운 갈등이 시작된다. 냉면 먹으러 와서 갈등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도 면수 대신 소주 한 잔 마시게 된다.
선주후면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공식” 기록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과자 회사의 밸런타인 초콜릿, 중식당 사장님들의 4월 4일 짜장면처럼 선주후면은 냉면집 사장님들이 개발한 참신한 마케팅의 결과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마케팅이면 어떤가. 평양냉면 먹기 전 술을 마시면 맛있는 걸 아는 사람은 알기에 평양냉면 먹을 땐 술 마시려고 차를 놓고 간다.
선주후면의 주인공은 선주가 아닌 후면이다. 냉면 관련 글에서 주인공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알맹이 없는 사탕 껍질이 되기에 냉면 이야기를 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선주후면의 후반부를 담당하는 냉면은 완벽한 술안주이자 완전한 한 끼 식사다. 냉면 한 그릇 속엔 서양 코스 요리의 전채, 메인, 식사, 디저트가 한꺼번에 들어 있다. 절인 무, 오이, 배추는 샐러드로서 식이 섬유를, 육수는 수프 역할을 한다. 편육, 꿩고기, 달걀 반쪽은 메인 역할로 단백질 공급을 담당한다. 탄수화물 메밀면으로 배를 채우면 완벽한 코스 요리다. 디저트는 없잖아? 냉면 위에 올라간 배를 잊은 그대에게 냉면 한 그릇 속엔 디저트도 들어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스위트 디저트가 부족한 분을 위해 계산대엔 박하사탕도 준비되어 있으니 냉면 한 그릇은 음악 장르에서의 한 편의 잘 짜인 교향곡과 같다.
교향곡(交響曲, Symphony)의 향(響)은 어울린다는 뜻이다. 코스 요리가 전부 들어간 냉면을 받아 겨자와 식초를 어울리게 첨가하여 최대한의 맛과 완벽한 한 그릇을 끄집어내는 당신은 교향곡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다. 젓가락은 지휘봉, 교향곡 지휘자답게 정신을 집중하여 이리 젓고 저리 저어 나만의 교향곡 한 그릇을 만든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지인들과 함께 히비키 21년에 평양냉면 한 그릇으로 선주후면하고 싶다. 일본 위스키 히비키(響)의 한자가 어울릴 향, 영어로는 하모니(harmony)라서다.
에브리바디 즐 냉 !
2025년 8월, 배상준(낭닥SJ)

글 낭만닥터 배상준
외과 전문의, 여행작가, 술/음식 칼럼니스트.
전 세계 여행을 하며 우연한 기회에 음식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메뉴판 해석학”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다. 그의 메뉴판 해석학의 첫 번째 프로젝트 일본 편은 일본 여행의 무한한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지금 행복하면 지난 모든 일이 추억, 지금 불행하면 지난 일들은 모두 후회”라는 그의 좌우명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쾌하고 행복하게 사는 50대 외과의사. 그는 맥주와 음식과 여행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은 맥주, 음식, 여행을 좋아하는 그를 좋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