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소수의 추억에서 대한민국의 대표 음식으로 …
국물은 한식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국밥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물이라고 하지만 더운 날씨가 길어지는 요즘 차가운 면식의 평양냉면이 그 자리를 뺏고 주연급이 되었다. 하지만 평양냉면이 대중화된 지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기후환경의 변화도 큰 몫을 했지만 냉면을 대중화로 이끈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몇 해 전에 작고하신 김태원 장인을 빼놓고 서울의 평양냉면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실향민이 아닌 평양냉면 장인의 탄생은 평양냉면의 다음 시대를 알리는 중요한 대목이다.
충청도 옥산이 고향인 김 장인은 냉면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다. 1952년 여름, 한국전쟁에서 형 셋을 모두 잃은 뒤 김 장인은 ‘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서울에 도착했으나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서울 을지로의 처마 밑에서 처량하게 비를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인연이었을까? 빗소리에 창문을 연 중년 여성이 그를 딱히 보았는데 그 집 주인이 경찰 감찰 부장이었다고 한다. 그의 손에 이끌려 ‘우래옥’ 주방으로 들어간 것이 훗날 대한민국 평양냉면의 대중화를 이끈 김태원 장인의 첫걸음이었다. 그날부터 주방장의 불호령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김 장인의 이마에는 주방장의 매질에 혹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故 김태원 장인의 생전 사진
우래옥에서 평양 출신 주병현 주방장을 만나 냉면의 모든 것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혹독한 시절을 지나며 국수틀 위에서 삶을 익혀갔다. 국수를 조금만 느리게 뽑아도 대나무로 된 국수밀대가 이마에 떨어졌다고 한다.
평양이 고향인 주병현 주방장의 평양냉면은 인기가 많았다. 김 장인은 손님이 많아서 하루 종일 육수를 끓여야 했고 어떤 날은 거의 만명 분의 육수를 끓여봤다고도 한다. 매일 새벽 네 시면 김 장인은 졸린 눈을 비비며 장작불을 때웠다.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주방장이 일러준 냉면 육수 비법을 외우고 또 외웠다고 한다.
주방장이 쓰러지고 60년대 중반부터 주방의 총책임자가 되며 그의 책임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고 한다. 냉장고가 귀하던 60년대 평양냉면을 시원하게 만드는 일은 전쟁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냉면에 올릴 편육을 차갑게 만드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주방 한켠의 커다란 궤짝에서 담배를 마는 종이에 쇠고기 편육을 말아서 준비했다고 한다. 서빙고에서 사 온 얼음덩이를 궤짝 밑에 깔고 그 위에 종이에 만 고기를 올려 차가운 편육을 만들었다. 냉장고가 보급된 70년대 후반까지 궤짝을 냉장고 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故 김태원 장인이 우리에게 남긴 한 그릇의 역사 © 봉피양 홈페이지
한국의 평양냉면은 크게 소고기 중심의 고급스런 ‘우래옥’ 계열과 돼지고기와 소고기 육수를 섞어내는 ‘의정부 평양면옥’ 계열의 서민적인 평양냉면 집들이 있다. 그 당시에는 고려정 · 한일관 · 조선옥 · 우래옥 · 서래관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고급 음식이었다. 김 장인의 명성이 사대문 안에서 서서히 퍼져갔으며 80년대 초반 성북동 요정집 ‘대원각’ 여사장이 그에게 파격적인 월급을 제시하며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대원각’으로 자리를 옮긴 김태원 장인은 요정이라는 사치스러운 공간에서조차 묵묵히 한결같은 손길로 냉면을 만들었다. 정치인과 재벌이 모여드는 밀실정치의 장면 뒤에서 그는 “냉면 한 그릇이 더위에 지친 민중을 위로한다”며 음식의 본령을 지켰다고 한다.

옛 요정시절 대원각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길상사의 극락전

과거를 잊은 듯 세속의 삶을 위로하고 있는 삼각산 길상사의 현판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출근해 500리터가 넘는 육수를 끓였다. 쇠고기와 돼지뼈, 노계, 양파, 무, 생강 등을 넣고 우려낸 육수를 끓이다 중간에 퍼내고, 다시 물을 부어 두 번째 육수를 낸 뒤, 이를 섞어 최종 육수를 만드는 방식은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이었다. 쇠고기 등 재료를 넣고 오래 끓이면 물이 증발 되는데 김태원 장인은 중간에 한 시간쯤 되면 육수를 퍼내고 물을 다시 넣어서 우린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처음 우린 육수와 두 번째 우린 육수를 적절히 섞는데 이 육수 비법이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진정한 고수의 기술이라고 한다. 거기에 당시에는 생소한 냉제육 반죽 같은 기술이 더해져 오늘날 평양냉면의 기본 기술이 만들어진다.
김태원 장인은 평양냉면을 실향민의 기억 속 음식에서 대중적인 외식문화로 바꾼 사람이다. 우래옥이 실향민 공동체의 향수를 지키는 성역이었다면 그는 봉피양을 통해 냉면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평양냉면의 마지막 장인’이라는 찬사와 더불어 ‘평양냉면의 전도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서울의 유명 냉면집은 모두 ‘김태원의 손을 거쳤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봉피양의 오너 김영환 회장은 스타 마케팅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회장의 기업 방향과 김태원 장인의 남의 말을 잘 듣고 잘 가르쳐 주는 성격이 결합해 주방에서부터 냉면 교육과 전파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듣는 인품과 온화한 성정을 바탕으로 도제 방식을 고집했다. 그의 제자들이 서울 평양냉면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수첩에 ‘정(正)’ 자를 써가며 냉면 그릇 수를 세던 그의 습관은 오늘날에도 봉피양 주방에서 전해지고 있다.
2019년 전후로 평양냉면이 한국 사회를 넘어 세계에 알려졌다. TV 프로그램 <수요미식회>가 평양냉면 열풍을 불러 일으켰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2018년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옥류관’ 평양냉면이 등장하며 국민적 관심이 폭발했다. 평양냉면은 분단 시대 평화의 아이콘이 되면서 세계에 알려졌다.
세계에서 차가운 육수 국물에 면을 말아먹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한민족의 오랜 국물 문화, 차가운 육수 문화, 김칫국 문화, 메밀국수의 다양한 전통이 평양냉면 한 그릇에 녹아 있다. 오랜 분단으로 인해 평양냉면은 ‘서울식 평양냉면’ 혹은 ‘서울 냉면’으로 거듭났다.
그 중심에 ‘태풍의 눈’ 같이 온화한 김태원 장인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