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 파스타, 어디까지 먹어봤니?
“오 볼로냐 사람의 피에 흐르는 고유한 부드러움이여.
볼로냐 사람들은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보카치오 『데카메론』 중에서-
“볼로냐.”
이구동성이었다. 내가 2019년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인턴을 끝내고 어디로 여행을 갈지 이탈리아인 셰프와 친구들에게 계속 물어보고 있었다. 최소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동을 견딜 희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볼로냐를 꼽았다.
의외였다.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를 놔두고 볼로냐라니. 그래서 자료를 찾아봤다. 자다가도 음식 이야기라면 벌떡 일어나는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볼로냐는 ‘미식의 수도’로 불린단다. 이탈리아 모든 가정의 냉장고마다 꼭 있다는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의 집산지가 볼로냐다. 탈리아텔레, 라자냐 같은 파스타, 모르타델라, 프로슈토 같은 이탈리아 햄, 레드 스파클링 와인인 람부르스코도 볼로냐가 원산지다.
그해 11월, 토리노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볼로냐는 고도(古都)였다. 중세부터 쓰던 붉은 벽돌 건물이 빛바랜 도심은 오렌지빛이었다. 개발 제한 정책으로 건물은 5층 정도로 낮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건물은 회랑(아케이드)으로 이어져 있었다. 도심 전체를 감싸는 촘촘한 회랑 덕에 “볼로냐에서는 비를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도심 전체를 감싸는 볼로냐의 촘촘한 회랑

스파클링 와인과 함께 즐기는, 볼로냐의 햄 & 치즈 플래터
친구들의 볼로냐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예언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볼로냐에서 젊은 여성에게 윙크를 받았다. 볼로냐에 도착한 날 저녁의 한 레스토랑에서였다. 이런 행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볼로냐를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난생처음 누리는 놀라운 환대였다.
음식도 친구들 말처럼 맛있었다. 파스타가 명불허전이었다. 생면의 성지로 불리는 볼로냐답게 볼로냐 식당에서는 거의 모든 파스타가 생면이었다. 내가 가장 많이 먹었던 파스타는 라구 소스를 얹은 탈리아텔레(Tagliatelle)였다. 탈리아텔레라는 이름은 ‘자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인 ‘탈리아레(tagliare)’에서 파생했다. 면은 꼬들꼬들했고 심이 씹혔다. 일본 장인이 만든 수타 우동을 먹는 느낌이었다.
손톱만 한 이탈리아식 만두인 토르텔리니(Tortellini)도 자주 접했다. 우리나라 만둣국처럼 맑은 육수에 말아줬다. 크리스마스 때 먹던 명절 음식이었다. ‘비너스의 배꼽’이라는 애칭도 있다. 그런데 한국 소비자에게는 파스타 하면 주로 건면인 스파게티나 링귀니가 익숙하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슬픈 역사가 있다.

‘비너스의 배꼽‘ 이라 불리는 이탈리아식 물만두 토르텔리니

볼로냐 수제 파스타 맛집 ‘스폴리아 리나(Sfoglia Rina)’의 토르텔리니와 수제 파스타 진열대
볼로냐 vs 나폴리, 파스타 논쟁
볼로냐와 함께 파스타의 원조 격으로 꼽히는 지역은 나폴리다. 두 곳 모두 토마토 파스타로 유명하지만, 토마토를 요리에 쓴 기록은 나폴리가 먼저다. 나폴리는 이미 16세기부터 토마토를 소스로 썼다. 나폴리가 유럽에서 ‘빨간 사랑의 열매’라며 관상용으로 키우던 토마토를 냄비에 서둘러 넣은 것은 다급함 때문이었다.
나폴리는 이미 10세기부터 식민 지배를 받았고 가난했다. 파스타는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 주던 음식이었다. 스페인 왕자들이 왕을 하던 나폴리왕국은 17세기부터 기계식 제면기 개발을 후원해 시칠리아의 듀럼밀을 가져와 파스타를 찍어냈다. 나폴리인들은 건면을 맛있게 먹기 위해 무엇이든 비벼 먹었다. 토마토도 그중의 하나였다. 토마토는 채소로는 특이하게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대이민 시대(Grande Emigrazione, 19세기 말~1920년)’에는 가난과 배고픔 탓에 이탈리아를 떠나던 1천만 명의 이민자 가운데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이 그 중에서 상당수를 차지했다. 가난뿐 아니라 지주 중심의 전근대적 토지 제도, 높은 문맹률, 낮은 공동체 의식 탓도 컸다. 특히 20세기 미국으로 건너간 이탈리아 이민자의 80%는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인들이었다. 이들이 미국에 소개한 음식이 토마토를 넣은 스파게티와 피자였다. 이런 남부 음식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코카콜라와 맥도날드와 함께 미국 문화로 포장돼 전 세계로 알려졌다.
반면 볼로냐는 16세기 교황령이 되기 전까지 번영했다. 볼로냐는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베네치아와 가까웠고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가는 길이 교차했다. 이런 지리적 이점은 우리나라의 대전과 비슷하다(대전도 볼로냐처럼 국수 문화가 발달해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볼로냐는 19세기부터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오스트리아 국경도시까지 가는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거기다 볼로냐는 나폴리와 달리 식민지가 아니라 시민 자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볼로냐는 11세기부터 황제와 교황청에 맞서 자치권을 획득했다. 고대 그리스처럼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진흙탕 같은 중세에서 구현하려고 했다. 제국과의 전쟁도 불사했다. 볼로냐는 자신들의 자치권 요구를 무력으로 저지하려던 신성로마제국과의 여섯 차례 전쟁 끝에 승리해 1185년 실질적인 자치권을 확보했다.
자치권을 얻은 뒤, 볼로냐 자유 시민들은 상공인 조합뿐 아니라 자조와 상호 부조를 위한 공동체 성격의 길드를 조직해 번영을 추구했다. 아울러 길드는 빈자와 고아를 돌보는 것은 물론 이방인을 환대했다.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체 활동에 참여했다. 토스카나 사람인 조반니 보카치오가 1353년 『데카메론』에서 “볼로냐인들은 찬사받을 가치가 있다”라고 적은 이유다. 1088년 설립된 볼로냐대학도 이런 볼로냐의 공동체 의식과 맞물려 있다. 왕권에 의해 설립된 다른 나라의 고등 교육 기관과 달리 학생들이 모여 교수를 초빙하는 공동체(Universitas)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주의 중심 도시, 볼로냐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교통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식문화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다.
볼로냐가 속한 에밀리아 로마냐 주는 알프스와 아펜니노 산맥에서 이어지는 구릉과 평야, 아드리아해 해안이 어우러진 지역이다. 이탈리아에서 경제·문화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안개가 잦고 춥다. 이런 기후는 곡물과 가축 사육에 모두 유리하다. 기름진 음식 때문에 ‘뚱보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라비올리를 많이 먹고, 볼로냐, 볼로네제, 모르타델라의 원산지다.
“모든 대학의 모교”로 불리는 볼로냐대학이 이룬 성과는 컸다. 볼로냐대학은 종교의 광기에 휩싸인 중세 유럽에서 인류의 갈 길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했다. 인간을 최초로 해부해서 신의 섭리가 아니라 장기가 생명을 좌우한다는 걸 알게 한 몬디노 데 루치(Mondino de Luzzi),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증명한 코페르니쿠스가 졸업생이다. 요즘에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개념도 볼로냐대학에서 처음 등장했다. 신 대신 인간을 강조한 르네상스와 왕과 귀족이 아니라 법과 인간 존엄을 외친 계몽주의라는 큰 물결이 볼로냐대학에서 시작됐다.
게다가 볼로냐대학은 당시 유럽에서 사회적 활동이 극도로 제한됐던 여성들을 학생으로 받아 학위를 수여했다. 실력이 우수하면 여성에게 강의까지 맡겼다. 대부분 유럽 대학이 20세기까지 여자 교수는커녕 학위 수여조차 꺼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12세기 볼로냐의 이런 결정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내가 받은 볼로냐 여성들의 환대는 이런 자신감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볼로냐인들은 소수를 위한 최고급 오트 퀴진(Haute cuisine, 고급 요리라는 뜻의 프랑스어)이 아니라 시민이 즐길 요리에 집중해 왔다. 물론 볼로냐에도 다른 도시처럼 송아지 비스테카(스테이크)가 있다. 그렇지만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이런 요리가 돼지를 2년간 방목해 키운 뒤 도축해 1년을 숙성해 만든 이 지역 프로슈토의 감칠맛을 당할 수는 없다. 볼로냐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돼지를 방목해 도토리를 먹여 키웠다. 중세에도 볼로냐 시민들은 전통 음식을 자유롭게 만들어 사고팔았다. 빵조차 스스로 만들어 먹기 어려웠던 농노의 삶을 살던 다른 유럽인들과 볼로냐 사람들은 다르게 먹고 다르게 생각했다.
뚱보의 도시 볼로냐에서 1873년 세계 최초로 생햄을 얇게 써는 기계식 슬라이서를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 제면기와 건조기를 합친 일체형 자동 파스타 제조기를 만든 것도 건면을 먹는 남부 이탈리아가 아니라 1933년 볼로냐 인근 파르마에서 였다.
모든 음식은 혀로 맛본다. 하지만 볼로냐 음식은 혀가 아니라 머리로 음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볼로냐 음식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다. 함께 자유를 쟁취하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나눠 온 공동체 경험이 중첩된 볼로냐만의 맛은 다른 도시 음식에서는 찾기 어렵다. 이 맛에 빠지면 부작용을 각오해야 한다. 볼로냐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볼로냐 요리와 볼로냐에서 먹었던 식재료를 찾게 된다. 볼로냐의 치즈와 햄은 현지에서도 상당히 고가다. 생면 파스타와 토르텔리니는 구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이 음식을 만드는 레스토랑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게 만든다. 맛있는 부작용이다.

글 권은중 작가
음식 저널리스트, 중앙 언론사 기자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에 음식과 역사를 다룬 칼럼을 썼고 와인 강연을 해왔다. 저서로는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묻다』,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음식경제사』, 『와인은 참치마요』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