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2월 2일, 보스턴은 기록적인 폭설에 휩싸여 있었다. 일하는 곳에서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는데, 아들이 갑자기 이가 아프다며 동동거렸다. 이미 눈은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도시 전체가 숨을 죽인 듯 조용했다. 그러나 아픈 아이를 두고 집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내도 허둥지둥 준비했고, 우리는 결국 눈보라를 뚫고 다시 시내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차를 몰고 가기엔 위험했다. 두꺼운 옷을 겹겹이 입히고 트램에 올랐다. 차창은 성에로 뒤덮여 바깥 풍경이 뿌옇게 보였고, 창문마다 김이 서려 희미한 불빛만 새어 나왔다. 눈에 파묻힌 가로등은 빛을 제대로 내지 못했고, 어둑한 건물들이 설원처럼 이어졌다. 승객들은 젖은 외투를 털며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차 안 공기는 차갑고 눅눅했으며, 바닥에는 녹은 눈물이 고여 발걸음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아내와 아들이 서로 손을 꼭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그 손은 그날 여정에서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사실 치과를 바로 찾아간 건 아니었다. 아들이 갑자기 아프다고 하니 마음은 급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는 인터넷을 뒤지고, 아는 분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 끝에 캠브리지에 한국계가 운영하는 치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눈보라 때문에 길은 미끄럽고, 영어 안내판만 가득한 낯선 동네라 처음엔 더 헤맸다. 다행히 치과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국어 안내가 들렸고,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캠브리지 치과 대기실은 고요했다. 의사는 차분하게 한국말로 치료 과정을 설명했고, 그제야 아내와 나는 굳어 있던 어깨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진료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드릴 돌아가는 소리에 움찔하기도 했다. 아내가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고, 의사의 불빛 아래에서 아이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묵묵히 치료를 받아냈다. 이를 하나 뽑고 썩은 이를 떼운 정도였다. 한국이었다면 동네 치과에서 몇 만 원이면 해결됐을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건네받은 청구서에는 천 달러가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눈보라보다 더 차갑게 다가온 건 바로 그 숫자였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긁을 때 손끝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고, 그 무게는 밤까지 식지 않았다.
치료를 마치고 나오자 다시 눈발이 몰아쳤다. 배도 고프고 몸을 녹일 곳이 필요했다. 우리는 보스턴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하인즈컨벤션센터로 향했다. 트램 정거장에서 내려 눈을 헤치고 들어간 그곳은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휑했다. 가게 절반은 셔터를 내렸고, 손님도 거의 없었다. 넓은 공간에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렸고, 빈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풍경은 차갑기만 했다. 싸늘한 공기에 기름 냄새와 단맛 섞인 소스 향이 겹겹이 퍼져 있었고, 뜨거운 음식에서 피어오르는 김조차 금세 사라져버리는 듯했다. 지갑과 마음이 함께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만큼 허탈했다.
그나마 문을 열고 있던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볶음밥, 레몬치킨, 차우멘 같은 메뉴들을 스티로폼 접시에 담았다. 얇고 가벼운 접시가 손에 쥐어졌을 때마저, 허전한 감촉이 마음까지 건드렸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날 당연히 칼국수나 국밥집을 찾아갔겠지만, 눈보라 속에서는 그런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가장 익숙하고 값싼 볶음면 차우멘이 우리 식탁에 올랐다.
아들은 포크로 차우멘만 집중해서 퍼먹기 시작했다. 이를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자기 접시를 비웠다. 내 접시까지 덤벼드는 모습에 아내와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여전히 머릿속이 청구서 생각으로 무겁기만 했는데, 아이는 눈앞의 볶음면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황당했지만, 결국 남은 건 그 소박한 한 접시와 아이의 웃음이었다.
그날의 식사는 착잡했다. 음식 맛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뒤 보험에서 상당 부분이 커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밥을 먹을 때는 몰랐던 그 안도감은 나중에야 찾아왔다. 부모로서 무력감이 크게 몰려왔던 순간, 오히려 아들의 엉뚱한 식성이 그 무게를 덜어주었다.
10년이 흘렀다. 아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머지않아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그의 식성을 살펴보면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볶음면이 있다. 보스턴 눈보라 속 푸드코트에서 퍼먹던 차우멘이, 지금도 그의 입맛에 남아 있는 셈이다. 한국에선 그 서양식 중식이 드물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중화풍 볶음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가끔 내가 직접 비슷하게 흉내 내어 만들어준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채소와 면을 넣어 휘리릭 볶아내면 완벽하진 않아도 비슷한 맛이 난다. 기름이 튀고 연기가 피어올라 주방이 어수선해지기도 하지만, 아들이 옆에서 포크를 돌리며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면 손이 절로 움직인다.
그날의 맛을 더 가까이 재현하기 위해 나만의 작은 비밀을 적어본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잘게 썬 생강을 살짝 볶아 향을 입힌다. 이어서 양배추와 양파, 당근 같은 엽채류를 넣고, 얇게 썬 고기를 함께 넣어 강하게 달군 팬에서 동시에 볶아 불향을 입히는 것이 핵심이다. 그 위에 삶은 면을 얹고는 노추를 팬 가장자리에 흘려 일부러 살짝 태운다. 순간 피어오르는 구수한 불향이 볶음면 전체를 감싸며 푸드코트의 차우멘 특유의 풍미를 되살려 준다. 마지막으로 굴소스와 요리당, 후추를 곁들이면 한 접시가 금세 완성된다.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그날 푸드코트의 미지근한 김과 아이의 표정, 거기까진 충분하다. 물론 여전히 여기에 적지 않은 비밀이 하나 더 있긴 하다. 모두가 아는 그 비밀 아닌 비밀의 가루.
돌이켜보면 그날의 경험은 단순히 한 끼의 식사가 아니었다. 한국과 미국의 제도 차이, 부모로서의 책임과 무력감, 그리고 소박한 음식이 주는 위로가 모두 얽혀 있었다. 내게 겨울의 국수는 청구서보다 오래 남아 있는 웃음과 위안의 기억이다. 결국 가장 단순한 음식이 가장 오래 기억되는 추억이 된다.
글쓴이 : 장성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