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국수 한 그릇에 소환된
다정한 기억들과 오감의 향연
국수는 밥보다 만만하다. 밥이 너무 모호하다면, 만만한 백반정식보다 만만하다. 그리고 냉면보다는 칼국수가 만만하다. 칼국수보다는 잔치국수가 만만하다. 그러니까 잔치국수는 그 만만한 국수들 중에서도 제일 만만한 급이다. 먹기 쉽고, 만들기 쉽고, 결정적으로 값이 싸다. 냉면 한 그릇이 만 오천 원을 넘어 이만 원에 육박하는 요즘, 이사 온 동네 시장 골목에서 난데없이 ‘잔치국수 전문 – 육 천원’이라는 문구를 맞닥뜨렸을 때의 반가움이란. 다음 순간 지금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를 따질 새도 없이 일단 가게 문을 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필 가게 안은 교회 집사님들 모임으로 왁자하다. 소란하고 열성적인 무리들 옆에서 혼자 좀 뻘쭘하긴 하지만, 잔치국수 한 그릇을 시키는 것쯤이야 혼밥의 달인인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칠순이 훨씬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살갑게 인사를 건네며 스뎅 그릇에 넘칠 듯 가득 담은 잔치국수를 날라준다. 김가루와 호박, 당근, 양파와 계란도 최대치로 올린, 꽤나 실한 국수 한 그릇이다. 따끈한 국물을 한 술 뜬 다음, 양념장이 있는지 여쭙는다. 싱겁진 않다. 양념장을 올려 풍미를 더하고 싶을 뿐이다. 어른 둘을 먹여도 충분할 것 같은 이 혜자로운 국수를 다 먹어 치울 만큼 배가 고팠던 것도 아니다. ‘잔치국수 전문’이라는 전단지를 발견한 순간, 허기가 시작되었다.
유난히 맘이 허한 오후였다.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일감을 떨치고 바람이라도 쐬러 나선 길에 발견한 가게였다. 그러니까 실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그저 헛헛한 속을 채워줄 뭔가가 필요했다. 나에게 그 뭔가는 십중팔구 국수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만만한 게 잔치국수다. 소위 말하는 ‘위로음식’인 것이다.
따끈하고 소박한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오감의 향연을 오롯이 누려본다. 기본은 면과 육수라는 간단한 구성이지만 잔치국수의 외양은 사뭇 단아하다.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국물 한가운데, 잘 삶긴 소면 한 움쿰이 섬을 이루며 자리한다. 흰 면발 위에 노란 지단, 푸른 호박, 붉은 당근, 검은 김가루가 더해진 고명의 조화는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고요하게 아름답다.

노란빛이 감도는 투명한 육수를 한 술 뜬다. 멸치와 다시마를 기본으로 양파, 파뿌리까지 가장 소박한 재료들이 모여 만들어낸 감칠맛의 향연을 맛보기 전에, 시원하고 간간한 멸치 육수의 바다 내음을 맘껏 들이마신다. 코끝을 파고드는 멸치와 파향이 다정한 기억을 소환한다. 어린 조카를 위해 국수를 끓여주던 고모, 명절 연휴의 끝 무렵이면 늘 유부를 잔뜩 넣은 잔치국수를 끓여 내던 엄마, 할머니의 손을 잡고 찾던 시장통 국수집의 구수한 온기까지, 나와 잔치국수 사이엔 할 이야기가 많다. 추억이 많다.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위장에 깃들어 사는 게 아닐까. 유난히 힘들고 쓸쓸한 날이면 포근포근한감자국을 끓여 밥 한 술을 말아야 하루를 견딜 수 있다는 선배가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음식이 잔치국수다.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이 외롭고 고단한 하루에도 잔치국수는 다정한 순간, 그리운 사람들을 소환해준다.
그리고 국수는 소리까지 함께 먹는 음식이다. 밥을 먹을 때처럼 입술을 굳게 닫을 필요가 없다. ‘후루룩’, 국수 한 젓가락을 넘기며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면 좋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희고 매끄럽고 촉촉한 면발을 한 입 가득 베어 문다. 손으로 치대고 삶고 건져내는 일련의 노동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쫄깃한 면발의 질감에 감사하며 천천히 한 그릇을 비운다. 멸치 육수의 깊은 감칠맛, 양념장의 짭조름함, 채소 고명의 달짝지근함이 차곡차곡 쌓인 한 그릇. 이제 남은 육수를 들이키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맑고 뜨거운 액체가 몸 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며 긴장을 풀어준다.
잔치국수가 선사하는 오감의 경험은 단지 한 끼의 만족을 넘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상징성을 획득한다. 고단한 일상을 달래주는 소박하고 부담 없는 한 끼, 이 소박하고 만만한 국수가 ‘잔치’라는 이름을 달고 인생의 가장 화려한 대소사에 등장하는 것은 재미난 역설이다. 인생의 중대사를 기념하는 모든 잔치에서, 축복의 상징인 긴 면발은 길고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하는 의례가 된다.
뜨거운 온국수가 쌀쌀한 계절의 언 몸을 녹이는 온기가 되고, 차가운 냉국수가 한여름의 청량한 쉼이 되듯, 잔치국수는 삶의 모든 계절을 유연하게 관통하며 우리의 희로애락에 곁을 내어준다. 일생일대의 인연을 시작하는 결혼식에서 평생의 고락을 기념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연회에 이르기까지 잔치국수는 빠질 수 없는 음식이다.
이때 잔치국수는 가장 단순한 재료로 삶의 오색찬란한 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가장 만만한 일상의 한 끼에서 길고 아름다운 생을 기념하는 의례까지, 잔치국수는 인생이라는 서사(敍事)를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지켜주는 소박하고도 위대한 국수다.


글 강종희 작가
저서 『어이없게도 국수』
숙명여대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 언론대학원 매스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 취득. 뉴스위크 한국판 공채 1기 기자 /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 근무 / 글로벌 제약기업인 아스트라제네카에서 10여 년간 브랜드 PR, 기업 PR, 위기관리 및 사회공헌활동을 총괄 등 역임했고 현재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